176 힘 빼고 힘차게
에티오피아 시다모 봄베 에이미 내추럴
양배추,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다. 두해살이 잎줄기채소다. 서늘한 기후를 좋아한다. 겉모습은 매끈하고 단단하고 동글동글 반짝반짝 빛난다. 녹색잎이 그대로 있는 신선한 양배추를 샀다. 양배추 한 덩이를 그대로 산 까닭은 내장지방 빼는데 탁월한 효능이 있다는 요리 채널을 보고 나서다. 어른 머리통보다 큰 양배추를 반으로 가르고 또 반으로 갈라서 요리라 하기엔 시시한 요리를 했다. 수박처럼 둥그렇게 커지는 내 배를 난감해하며 양배추를 찌고 볶고 샐러드로 변신시켰다. 서걱서걱 숭덩숭덩 썬 양배추는 물기 없이 살짝 쪄 대나무숙성 까나리액젓 들기름 청양고추 쪽파 볶은 참깨를 넣어 무쳤다. 양배추나물이라 불러도 좋다. 어슷 썬 당근과 다진 돼지고기 새송이버섯을 넣어 양배추 볶음도 했다. 나머지는 가늘게 채 썰어 케첩 마요네즈에 비볐다. 양배추 요리를 한 번에 여러 개 한 것도 처음이고 반찬으로 먹는 것도 드문 일이었는데 이제는 건강을 위해서 자주 먹어야 한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배를 보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다.
읽고 쓰면서 넓은 세계를 만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스무 살 전의 일이다. 그때는 참 많이 읽고 썼다.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받은 상이 글쓰기 재능인 줄 여겼는데 아니었다. 스무 살 이후에는 적성에 안 맞는 걸 하고 있다. 적성이 뭔지 몰라서 적성에 맞는 걸 한 적이 없다. 적성을 찾으려 해도 드러나는 뚜렷한 재주가 없다. 그저 잔뜩 긴장한 채로 발끝을 세우고 호흡을 아끼며 산다. 지금이라도 적성을 찾고 싶다는 생각은 하면서.
누군가가 끓여 주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 카페에서 마시는 것과 또 다른 맛이 날 것이다. 커피를 끓여 준다는 이가 있다면 먼 길이라도 달려갈 것이다. 원두를 갈고 물을 끓이고 잠시 숨을 참고 뜸 들여 내린 커피를 꽃이 활짝 핀 잔에 담아 내 앞으로 내어준다면 두 손으로 받아 감사히 마실 것이다. 나를 위해 끓여준 커피, 참 맛있을 것이다. 까칠한 마음이 상냥해질 것이다.
엄청 덥다. 날씨는 좋~다! 맹렬히 울어대는 매미 소리에 다른 소리가 잠긴다. 또르르 흐르는 물방물이 반짝거리는 아이스커피가 맛있는 계절이다. 바람이 부는 공원에서 나를 위해 끓인 커피에 얼음 가득 넣어 마시고 싶다. 다정한 마음을 담아 나를 위해 끓인 커피는 달달하지 않아도 달달할 것이다. 맑은 커피색이 더 시원하게 느껴질 것이다.
오늘의 커피는 에티오피아 시다모 봄베 에이미 내추럴. 재스민 향기가 난다. 얼그레이 차 맛이다. 부드럽고 쌉쌀하다. 햇볕에 바삭하게 마른 얇은 여름 이불에서 뭉그적거리는 기분을 느끼는 맛이다. 심기가 불편하면 비교제 얼굴에 잘 드러나는 성격 탓에 계속 불편해해서 미안한 채로 지내는 게 어려운 사람인 나는 어떤 식으로라도 그 상황을 정리해야 다음으로 갈 수 있다. 사소한 일이라 여긴데도 마음속에 불편함이 가득 차서 오도 가도 못하는 마음으로 지낸다. 싫은 건 아닌데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닌 것이 채워져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피곤하다. 오늘의 커피는 이런 어정쩡한 심기를 정리해 준다. 왠지 불편함을 알아준다는 느낌이다. 늘 생각대로 되지 않는 날들이지만 오늘도 소중한 마음을 담아서 열심히 지내면 됩니다 하고 말한다. 힘 빼고 힘차게 지내는 것이 약이랍니다. 바로 좌절하고 고개 떨구고 포기하지 말고 느려도 지긋하게 바라보는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라며 등을 두드린다. 흔들리는 초록 나뭇잎 사이로 부는 여름 바람 같은 반짝하는 특별함을 아는 커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