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끼리 매월 한 번 모이는 곳에서 술이라도 한 잔 들어가면 본격적인 대화가 쏟아집니다. 한 달에 한 번 모여도 할 말은 무한대인가 봅니다. 원형 테이블 셋에 자리가 꽉 찹니다. 밖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방안에 둘러앉아 술잔을 나누니 분위기도 딱 좋습니다. 비교적 나이가 많은 선배들 자리에 앉았습니다. 식사를 대충 마치고 술이 한 순 배 돌고 나니 다른 테이블에서 우리 테이블로 후배들이 한 두 명씩 와서 술잔을 건넵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흡사 술 많이 마시기 시합 같은 무식한 일은 벌어지지 않지요. 최근 여러 모임에 가보면 술마시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초저녁부터 술에 무슨 원수를 진 것처럼 소주 맥주 몇 박스를 쌓아놓고 폭음을 하던 시절은 사라졌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체력과 주량이 급격하게 떨어진 탓이겠지요. 건전한 모임 방식, 술문화인 것 같습니다.
어느 후배가 우리 테이블에 앉자마자 한 명씩 술잔을 건넵니다 내키지 않아도 마셔야 할 분위기입니다. 제 순서에선 부드럽게 넘어갔습니다. 그 후배가 저에게 유머와 함께 믕 건강하시란 덕담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 바로 오른쪽에 앉아 계신 선배님께서 하신 말씀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선배님은 평소에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않고, 말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후배들에게도 넉넉한 선배 이미지가 있어서 호감을 많이 받는 분이셨지요. 그리고 모임에 가면 저와 자주 곁에 앉게 되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이번에도 저에게 근황을 들려주시면서 당신의 손자 자랑을 하셨지만, 적정한 선에서 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집 3남매 결혼 소식은 언제 들려 줄거냐고 슬쩍 말하기도 했지요. 그렇게 저와 담소를 나누던 그 선배가 좀전의 후배를 바라보면서 한 마디 던집니다.
"00 니는 말만 크게 해놓고 늘 결과는 구라로 끝나더라. 어디 놀러가자 해놓고 가보면 니는 빠져 있고, 처음과 전혀 다른 일처리가 영 좀 그렇데."
후배의 얼굴 표정이 일그러집니다. 분위기를 살려보겠노라고 호기롭게 우리 테이블에 와서 선배들에게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는데, 면전에서 그것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인신공격성 말을 들으니 참기 어렵겠지요. 저도 그 순간 불편했습니다. 후배가
"형님 저 그런 적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님이 말씀하신 거 같은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좀더 이야기가 길어지면 자칫하면 싸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들이 적절하게 말렸습니다. 후배도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하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이 선배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는 저도 다른 사람들도 모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그 일의 앞뒤 맥락이나 두 사람의 평소 인간 관계도 충분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를 함부로 평가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무래도 제 3 자 입장에선 그런 언쟁이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고, 한 걸음 떨어져 볼 수 있게 되지요. 이 선배는 그렇게 상대방을 심하게 지극하는 말을 던져놓고선 제 걱정과 달리 오히려 희희낙락합니다. 상대방이 얼마나 불쾌했을까를 모르고 있는 것일까요. 알면서 일부러 한번 떠 본 것일까요. 그래서 그 선배께 슬쩍 말했습니다.
"아까 그 00에게 면전에서 그렇게 심하게 말하면 우짭니꺼?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꺼? 우리들이 있으니 정색도 못하고 기분은 나쁘고 좀 그렇네요. 선배님께서 농담이라고 여기실지 모르지만, 저 00도 이제 나이가 만만찮다 말이지요. 적절하게 틈을 봐서 부드럽게 풀고 그렇게 하이소. 우리가 무슨 피를 나눈 형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향이 같은 사람들도 아니니 내일 당장 안 본다 그러면 그만인 관계 아닙니까. 좋은 게 좋다고 선배님이 사과도 하고 얼른 풀어버리세요."
그렇게 권해도 이 선배는 능글능글 웃으면서 제 말을 수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후배는 저녁 내내 아니 집으로 돌아가서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겉 같아 걱정입니다. 내일부터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두고 두고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싶네요. 둘이 이전에도 이런 일이 많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또 그렇게 익숙한 사이인지 모르지만 이 순간만 보자면 나이 먹은 선배가 나이값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요. 아무리 농담이라 해도 면전에서 그렇게 심한 말을 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저도 더 이상 개입하기 싫어 폭우 핑계 대고 집으로 일찍 돌아왔습니다. 모임에 갔다가 일찍 돌아오니 아내가 깜짝 놀라듯이 반겨주네요. 좀더 일찍 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서 책상에 앉아 생각해 봅니다. 인간 관계를 형성해 나가면서 '충고'는 가급적 안 하는 것이 좋더군요, 충고해서 고쳐진 사례도 별로 없을 뿐 아니라 그때까지 쌓아온 관계도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냉랭 또는 애매한 사이로 변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설픈 충고는 더 더욱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에 나이가 들면 후배들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면 상대방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여 보다 세련되고 우아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