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밤늦게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넷플릭스 영화를 보려고 막 사이트를 열려 하는데, 현관 문을 누군가가 아주 거칠게 두드립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거칠게 우리집 현관 문을 두드리는 일이 없었는데 잘못 찾아온 것으로 여겨 문을 열었습니다. 비교적 젊은 남성 한 분이 아주 화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면서 확인합니다. 술도 한 잔 거나하게 했는지, 아주 불콰한 얼굴로 저를 노려봅니다. 저도 이런 경우는 살면서 처음이라 도대체 무슨 문제로 오셨는지 물었지요. 그러자 그분이 대뜸
"요기 라인 대표님 맞지요."
아파트 주민대표자회의 전체 회장도 아니고 기껏해야 제가 사는 라인 대표로 회의에 참가하는 사람이라 무슨 결정권도 없고, 그렇다고 주민들과 직접 맞닥뜨릴 일도 없는데 이렇게 화난 주민과 맞닥뜨리니 난감하더군요. 제가 맞다고 답하자마자 그분 속사포처럼 퍼붓습니다.
"있잖아요. 우리집 22층인데 물이 어제부터 안 나와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관리소장에게 전화를 거니까 첫 마디가 진짜 저를 화나게 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회장님 집에 갔더니 서울 가서 안 계시고, 경비 반장도 해결 방법이 없다 하제. 관리소장은 전화로 기분 나쁘게만 하제. 기술 주임은 어딜 가서 연락도 안 된다 카제. 내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더. 오늘밤에 해결해주지 않으시면 저 내일 새벽에 구청, 항만소방청, 경찰서 곳곳에 민원을 제기할 생각입니다. 당장 해결해 주이소."
제가 무슨 기술자도, 전문가도 아닌 사람인데 이밤에 무슨 수로 해결한다는 것인지, 그리고 왜 제가 이분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우선 그분 속사정을 들어주어야 하겠기에 현관문을 닫고 같이 엘리베이터에 탔습니다. 현관에서 둘이 행여 언쟁이라도 하면 아파트 라인 전체에 울려 다른 주민들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서 1층으로 갔습니다.
아파트 주차장에 내려가자마자 있었던 사정을 세세하게 들려줍니다. 관리소장과 나눈 전화 통화 기록도 들려줍니다. 최근에 아파트 대표자회의 일원으로 매월 정기 회의에 참가하고 있는 저 입장에서 참으로 난감했지만, 화난 사람의 입장을 들어주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요. 그분이 화가 난 가장 큰 핵심은 관리소장의 전화 첫 마디였답니다.
"내말 한번 들어보이소. 제가 어제부터 물이 안 나와서 어제 밤에 소장한테 전화를 했더니 대뜸 하는 말이 '지금 시간도 많이 늦었고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으니 정 급하면 1층 지하수 물을 길어다가 엘리베이터로 올라가서 우선 임시로 그것을 쓰시면 안 되겠느냐, 기술주임은 시골에 가셔서 지금 연락도 안 된다. 그러니 월요일 출근할 때까지 어쩔 수 없으니 기다려 달라. 등등 말하기에 내가 진짜 정말 기분나쁘고 화가 나더라고요. 우리가 관리비를 낼 때는 그래도 보호를 받기 위해 내는데, 이런 비상 상황에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해결해 줄 생각도 않고 뭐 1층에서 22층까지 물을 퍼서 가져다 쓰라고요. 화가 안 나게 생겼습니까. 제 말이 그렇게도 무리입니까? 솔직히 내일 아침 일찍 식구하고 목욕탕에 가서 씻고 출근하면 됩니다. 하지만 소장 말 뽄새가 뭐 그렇습니까. 화 안나게 생겼습니꺼? "
매일 새벽 5시에 부인과 아들 셋이 출근하러 나간답니다. 그래서 집에서 씻지 못하니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제가 들어봐도 입주민 입장에서 관리소장의 그 말에 화가 솟구치게 되었겠네요. 이틀 동안 수도 물이 안 나오면 온 가족이 큰 불편을 겪게 될 텐데 정말 힘들지요. 관리소장도 참 문제가 많네요. 우선 주민의 불편한 입장을 먼저 챙기고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데, 냅다 그렇게 말해서 얼마나 화가 나시겠습니까? 관리소장이 잘못 말해서 화가 나게 해드려 제가 오히려 죄송합니다. 진짜 미안합니다."
그분이 했던 말 또 하고 반복하니 시간이 흘러갑니다. 저의 양 다리에 모기가 여러 군데 물었습니다. 반바지를 입었으니 모기한테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지요. 그분의 언성도 점차 내려갑니다. 지금껏 자신이 겪었던 여러 불편 사항을 참으로 구구절절히 들려줍니다. 저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화가 잔뜩 난 사람의 속사정을 들어주면 분이 조금이라도 풀리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아파트 대표자회장님은 마침 서울에 가셨고, 기술주임은 시골가서 연락이 안 되고 관리소장은 주민이 그렇게 불편을 겪고 있는데도 와보지도 않으니 애꿎은 저만 붙잡고 당신의 화난 마음을 거의 한 시간 가량 늘어놓았습니다. 제 입에선 그냥 '죄송하다. 미안하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내일은 일요일이라 기술주임이 출근하지 않는 날이지만 당장 전화해서 내일 아침이라도 오게 하여 불편을 해소하도록 노력해 보겠다. 등등만 말했지요. 그러자 그분도 마음이 많이 풀린 모양입니다.
말미에
제가 다시 한 번 '미안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이니 그분도 '저도 죄송합니다.'라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응했습니다. 둘이서 헤어지면서 미인하다는 말을 두어 번 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 제 집 현관문을 거칠게 두드리던 기세는 어디로 사라지고 이렇게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변할 수 있나 신기하네요. 그리고 그분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일요일 오늘 아침에 기술주임이 출근하여 그분 댁 수도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회장님이 전화를 거니까 한결 기분이 풀린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주민 전체를 대표로 욕받이 역할을 한 것 같다면서 위로를 해줍니다. 솔직히 저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 젊은 사람의 화가 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 줄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을 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