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를 입학하고 졸업할 때까지 배우는 많은 과목들은 거의 비의료인에게는 생소한 제목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의사실기 과목 중 의대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 중 하나, 듣기만 해도 내용을 알 것 같은 단원이 있다. 바로 '나쁜 소식 전하기'이다. 이 단원에서는 말 그대로 환자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공부'한다. 조금 내용에 대해 소개를 하자면 이런 식이다. 예비 의사가 방안에 들어서면 이번 검사 결과가 궁금한 환자(연기자)가 앉아 있다. 책상에 있는 지시문에는 '왼쪽 눈이 실명인 환자에게 반대쪽 눈도 곧 실명하게 될 것으로 설명하세요'라고 되어 있는 상황이 적혀 있다. 1분 후 시작종이 울리면 이 나쁜 소식을 환자에게 잘 전달해야 하는 그런 과목이 되겠다. 분명 어려운 내용인 것은 확실하나, 나는 이 단원을 만든 사람도, 공부하는 학생들도 그 중요도에 대해 이해를 잘못하고 있다.
부분타우수. 죽음 또는 안 좋은 소식을 받아들이는 5단계로,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순서로 환자가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정신과적인 이론이다. '나쁜 소식 전하기'의 문제 해설집에는 환자가 5단계로 반응할 때, 그에 맞는 대응을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당시 같이 공부하던 많은 의대생들은 내가 느끼기에, 이 풀이들을 외웠다. 그렇기에 공부했던 문제 말고 다른 안 좋은 상황이 지시문에 나오면 당황하고, 어떻게 적용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들이 생기곤 했을 것이다.
교육 방식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런 틀에 박힌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나쁜 소식을 전하는 선배 의사들 옆에 학생들을 세워놓고 어떻게 하면 환자가 듣기에 힘들지만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실을 전할 수 있는지 실전적인, 철학적인 고민이 있어야 하는 과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폐암 4기입니다"라고 직언을 하는 선배 의사들만이 있는 현실에서 그런 교육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문학을 공부한 다른 직종의 사람들이 의대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나섰지만, 의사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를 의대생들은 듣지 않았기에, 결국 남은 방법인 주입식으로 사건을 머리에 넣는 방법이 채택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능의 역설'이라는 책이 있다. 일부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이상하게 일반 사람들처럼 왜 행동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담겨 있다. 현대 사회와 같이 사냥에 필요한 실전 생존 능력이 중요시되지 않는 사회가 된 지 100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면 우대를 받는 세상에서 나조차도 공부만을 잘하기 위해 사회성,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한 공감들은 키우지 못한 채로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책으로만 읽는 인문학은 실전에서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나는 반대로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처럼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 부적응한 아이가 되어 대학생활의 초반을 외롭게 지내야만 했었다. 이것이 당신의 주치의가 울지 않은 첫 번째 이유이다. 대부분의 우리 의사들은, 힘든 환자에게 공감하는 기초적인 능력조차 잘 모른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바뀌어야 할 때가 왔다. 사람의 마음에 대한 공부는 정신과 의사만이 할 내용이 아니다. 그들은 검사 결과가 폐암 4기인 것을, 또는 검사 결과가 정상인 것을 듣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우리 환자들은, '아파서', 아파서 온 사람들이다.
그 아픔에 대해 알아주지 않고 폐암 4기, 정상이라는 '팩트'는 환자의 알 권리만 충족시킬 뿐, 그들이 우리를 찾아온 이유가 아니란 것을 이제는 알 때가 되었다.
6부에 계속...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던 말, 나를 주저하게 했던 그 말. '고소당하지 않는 의사가 훌륭한 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