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들과 딸 둘, 그리고 아내분이 수술 결과를 듣기 위해 왔다. 모두에게 같은 충격을 전할 수는 없었다.
10년 전, 중환자실로 아버지가 먼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던 나의 기분을 기억하기에, 조금씩 단계별 접근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나마 가장 정신을 차리고 있어 보이는 아들을 먼저 불렀다.
"수술했던 팀 어시스트를 맡았던 의사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준비가 되시면 말씀드릴게요. 먼저 혼자 들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아드님 먼저 불렀습니다. 다 같이 듣는 게 나으시겠어요? 아님 혼자 들으시는 게 나으신가요?"
"먼저 혼자 듣겠습니다..." 내 또래의 아들은 두 손을 모으고 들을 준비를 마쳤다.
나는 이제 안타까운 현실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미 목 안쪽으로의 감염이 많이 진행되었고, 그동안 혈압이 계속 떨어지고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 이유를 찾긴 했습니다. 목의 가장 큰 혈관 중 하나인 경정맥이 거의 녹아 없어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무 죄송한 말씀이지만... 다음번 대량 출혈이 또 발생했을 때는 버티실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많은 피의 수혈이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몸 상태가 못 버티실 수 있어요.
항상 면회를 오실 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아들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도 너무 마음이 아팠다.
감정은 '전이' 된다. 정신과적으로 전이 역전이의 정의가 다르지만, 자연스럽게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전이가 잘 되는 편이다. 이 상황에서 나도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를 잠시라도 생각하다 보면 눈물 꼭지가 고장 나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울 수는 없다. 최대한 덤덤하게... 최대한 덤덤하게...
" 이 내용을 다른 가족분들한테 다시 말씀드려도 될까요..? 아님 직접 말씀하시겠어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 선생님이 다시 한번만 말씀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대신 조금만 더 약하게.. 부탁드립니다."
큰아들의 가장으로서의 마음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이제 남은 역할을 수행해야 할 터였다. 그는 조금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음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남은 가족들을 모아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의 요청대로 더 천천히, 시간을 들이며. 그리고 감염내과 주치의의 허락을 받고 영원한 안녕을 고할 시간을 드렸다. 오늘이 진짜 마지막일 수 있기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을 하고 아버지 곁으로 간 아들도, 다른 가족들의 흐느낌에 같이 고개를 떨궜다. 나의 역할을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이제 내 뒷모습을 볼 필요가 없기에, 나는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자리를 피했다.
옛날 의학드라마를 보면, 의사는 항상 권위적이고 따뜻하지 못하다. 요새 나오는 슬기로운 의사 생활 같은 드라마를 보면 조금은 더 인간적인 모습이 나오는 것 같다. 드라마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이제 권위적인 의사가 아니라 더 사람다운 인문학적 의사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그동안 우리는 그러지 못했을까? 그 이유를 생각해본다.
4부에서 계속...
나쁜 소식 전하기, "폐암 4기 입니다. 네 다음 환자" , 고소당하지 않는 의사가 좋은 의사?, 쓰러진 사람 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