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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을 확인한 시간

by 승환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당선의 기쁨과 낙선의 허탈함이 교차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한 희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예상 밖의 결과에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고, 나 역시도 그중 하나였다.


이토록 서로 다른 생각, 감정,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구나 하는 깨달음은 놀라움보다도 낯선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단지 정치적 의견의 차이라고 보기엔, 이미 ‘종의 분화’처럼 느껴지는 근본적인 단절이 느껴졌다. 마치 사람들은 현실에 발 딛고 있지만, 정신은 각기 다른 차원의 세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언어를 공유해도 정서와 맥락은 전혀 맞지 않는 이질감. 이것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공감의 단절이며, 어쩌면 디스토피아적 현실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차원이 있다면 그 곳으로 우리의 몸이 아니라 영혼 정신이 살아가는 것일 거 같았다.


선거철이 되면 밭을 간다고 사람들을 설득하려 애쓰기도 한다. 하지만 설득보다는 혼란과 자신을 의심하기도 한다. 가족, 친구, 동료들마저 전혀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판단을 내릴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틀린 걸까?’

‘내가 너무 감정적인가, 아니면 현실을 못 보는 건가?’


스스로를 검열하고 검토해보지만, 쉽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념도, 신념도, 삶의 양식도 전혀 다른 사람들 속에서 혼란은 커지고, 결국 질문은 바뀐다.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분열되었는가?”

그리고 “이 분열은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가?”


답은 뻔하지만 해결은 난망하다. 서로를 향한 불신과 비난 속에서 진짜 문제는 흐려지고, 정작 책임져야 할 자들은 뒷전에서 웃고 있다.


어쨌든 선거는 끝났고 세상은 다시 돌아갈 것이다.

이제 당선자는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예상커대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손길이 향할 곳은 상처의 깊은 고름이 아니라 겉에 흐른 피일지 모른다. 피를 닦고, 대일밴드를 붙이고, 그럴싸한 말로 안정감을 준다.


문제는 겉이 아니라 속이다. 살 속 깊이 숨어 썩어가는 고름을 짜내는 일은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결국 해야 할 일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쯤은 제대로 짜내려 덤벼야 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으면 손도 씻지 않은 채 상처를 만지며 세균을 퍼뜨리는 자들, 바로 그들이 이 모든 사태의 원인자이자 수혜자가 되어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 성향을 경제적 조건, 특히 거주지나 자산으로 설명하려 한다.

“강남이 보수적인 건 땅값 때문이다.”

“용산은 부자 동네니까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 정서와 가치관, ‘민심’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싶다. 보이는 결과만으로 판단하면 우리는 진짜 이유를 놓친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산의 감소가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의 균열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믿어온 가치가 뒤집히는 세상에 대한 불안.

그것은 자산 규모나 경제적 계층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인간적 본능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 민심이라는 것, 다른 말로는 정서과 가치관일 것이다.

분명 잘못과 비리와 병페가 보이는 모든 사회적 악의 모습을 알고도 눈 감으려고 하는 것일까 왜 그 잘못을 인정하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는 것일까?

정치 특히 선거가 마음을 이끌어내는 일이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조종하고 교육시키는 일과 맞닿아 있다.


나의 아버지 세대 1930년대 40년대 분들은 교육의 시혜를 받은 이들이 아니다 일부는 많이 배우고 지식인이 될 수 있을지언정 대부분은 신문과 사람들과의 대화와 사회를 나와 살아가면서 세상을 배우고 정치를 알게 된 사람들이다.

민주주의를 처음 접한 세대였고 전쟁과 식민의 시대를 지나온 이들은 보고 듣고 배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일본의 천황을 칭송하는 교육을 배우고 조선과 유학의 정의를 배우고 전래내려오는 역사와 영웅을 믿었다.

제도보다는 사람을 믿었고 인물의 훤칠함을 인덕을 믿었다.

나이가 들어서 배우지 못했던 것들은 신문과 책속에서 세상을 배웠다.

언론이라는 것은 아직 덜 때가 묻었고 신념이있고 지조가 있었고 정의가 살아있었다.


50년대생들 지금의 70대 전후의 사람들은 바로 윗세대의 영향을 받았고 자본주의의 맛을 보았고 유신아래의 교육에서 받은 반공의 여파가 지워지지 않았다.

전세대보다는 더 풍요롭지도 않았고 각박한 시절을 지나왔다.

학교를 졸업 후 인문학적인 소양이나 가치관의 정립에 급격하게 늘어나는 교회의 목사들에게 의지한 시대라고 생각이 든다. 기독교뿐 아니라 온갖 사이비와 양아치 종교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세를 불려가기 시작하는 초기의 시대였다

교회는 내적으로 비워가고 외향은 대기업이 커가듯 키웠다 각각의 교회는 다 다른 종교였고 이사를 가도 전에 다니던 목살르 찾아가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이 된다.

집 앞의 슈퍼에서 살 수있는 작은 것 하나보다도 같은 교인의 물건을 팔아주기 위해 차를 타고 삽십분을 달려 오기도 한다. 경제적 윤택함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그 열매를 그렇게 교회로 쌓아가던 시대였다.

그래도 마을이나 동네의 규범이나 관습적인 도덕심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켜진 세대이기도 했다.

정이라는 것과 사람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았다. 또 경제성장의 첫 과실과 부동산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첫 세대들이라고 생각이 된다.

열심히 정말 잠도 안자고 일했던 사람도 많았지만 직장과 사회에서 놀고 먹고 사기치고 깡패짓하고 비리를 일으키는 원조들도 그 세대라고 생각한다.

공 교육과 유신체제를 그대로 체화한 세대, 그들은 유례없는 도시화와 산업화를 겪으며 절박하게 살아냈고, 동시에 종교와 공동체, 특히 교회에 의지하며 도덕성과 정서를 형성했다. 이들 중 일부는 헌신적이었고 정의로웠으나, 또 다른 일부는 그 틈에서 부정과 비리를 낳기도 했다. 한국 사회의 양면성은 이 세대 안에도 뚜렷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이후 1차 2차 베이비부머들 60년대 중반 이후는 전세대보다 교회나 종교에 휘둘리지 않았다 학교의 교육과 거리의 데모를 가담하고 목도하고 영향을 받은 세대들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와 지는 것을 지켜보기도 누려보기도 시작했다.

지금 나라의 중추가 되는 세대이기도 하지만 지식이나 배움이 부족한 세대가 아니였지만 가장 탐혹스런 세대이기에 소수지만 정치나 각 사회 지도층에 있는 일부는 빌런이 되었다.

물질과 황금에 가치가 전도되기 시작하고 사람은 그저 경쟁하고 넘어서야할 대상으로 배우고 커왔다.


엠쥐세대니 그 이하는 좀더 지켜보고 싶다

특히나 삼십대 이전의 세대가 바라보는 세상은 분노에 차있다.

젊은층은 분노와 허무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들은 종교도, 학교도, 사회도 믿지 않는다. 롤모델 없는 세대, 경쟁만을 배운 세대, 욕망을 자극당했지만 어떤 기회도 받지 못한 세대다.

이들은 종교에도 학교에도 영향받지 않는다 따라야할 선행한 선배들도 배우고 싶은 롤모델이 부재한다.

욕망을 커닿게 크도록 부채질 하면서 충분이 무엇을 사회는 줄 여건이 안된다.

남자들의 가장 아름답지만 초라하고 불행한 불안전한 시기인 20대를 누구도 보듬어 주지 않고 비난하고 비교질 한다. 사실 누가 알려주거나 밀어주는 것은 없어도 나이를 먹고 커가면서 20대는 다른 생각이 피어나고 변해 갈 것이다. 그렇지만 한번씩은 그들을 돌아봐 주는 것도 필요하다

이들은 외면당하고 있다. 특히 20대 남성은 가장 불안정하고 고립된 시기를 조롱과 비교의 언어 속에서 방치되고 있다.


우리는 성별로, 지역으로, 나이로 서로를 평가하고 싸운다. 그러나 그 모든 분열의 기저에는 교육의 실패가 있다. 교육이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기보다 경쟁과 암기, 줄 세우기만 강조한 결과,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 능력을 잃었다.

돌봄학교니 뉴라이트니 해서 엉뚱한 사상과 가치관을 심어주는 일을 나라돈으로러 한것에 분개한다

‘돌봄학교’, ‘뉴라이트’ 같은 정책으로 잘못된 사상과 왜곡된 역사를 주입하면서, 정작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공감과 논쟁의 윤리, 사회적 책임감은 교육하지 않았다.


힘있는 자들에 빌붙어 같이 영달을 얻으려는 언론들을 규제하여야 한다.


썩을 대로 썩은 제국의 판검사 후손들을 이대로 두면 안된다. 사람을 부리고 다스리는 것은 상도 주고 벌도 주어야 하며 그것이 공정하지 않음 안된다.


마지막으로 제정일치 고대국가도 아니고 종교인들의 정치활동 및 로비를 방관하면 안된다. 법으로 제도화하고 모든 종교의 유일한 관심사인 세금을 매기도 투명하게 관리하고 통제해야 한다.

온갖 무속과 불교의 폐단이 크지만 요즘은 기독교의 일부 아니 꽤 많은 교회들을 지켜봐야 한다.

하느님이 허락하고 명령하고 지지한다는데 어느 교인이 나라의 법이나 가치관이 중요하게보이겠는가 죽음도 순교의 영광이라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나라가 유지될리가 없다.

종교는 정치와 편승했다. 정치화된 교회와 탐욕스러운 종교 지도자들은 진실보다 자신들의 안위를 선택했고, 정치와 종교의 결탁은 결국 진실을 왜곡하고 국민을 더 분열시켰다.


우리는 분열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누적된 교육의 부재와 언론의 타락, 종교의 탐욕, 정치의 무책임이 우리를 갈라지게 만들었다. 이제 중요한 건,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연결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 시작은 이해의 언어를 회복하는 것, 그리고 교육, 종교, 언론이 제 역할을 하도록 시민이 감시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만이, 갈라진 마음들 사이에 다시 다리를 놓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상한 나라의 폴은 나나를 구출하기 위하여 이계의 세상을 뛰어들 듯 문이 닫히기 전에 또 다른 차원에 가있는 사람들을 구하러 가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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