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 없이 트래블 머그를 3년간 사용한 사람 이야기
2019년 6월, 블루보틀 신주쿠점에 들렀다. 도쿄에서 열린 문구-사무용품전(ISOT)을 회사 사람들과 관람한 뒤였다.
이맘때쯤 블루보틀이 한국에 막 진출했다. 블루보틀 성수점은 한국 최고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고, 삼청점은 아직 세상에 없었다. 성수점에 사람들이 매일 몰려 길게 늘어섰고 그 모습은 지상파 저녁 뉴스를 타기까지 했다. 신주쿠점 내의 혼잡함 역시 성수에 못지 않았다. 아니 신주쿠가 원조라고 해야 하나? 아니지. 이거 미국 브랜드잖아. 아무튼 주문하는 줄도 매장 내에서 몇 번이나 꼬여 있었는데, 음료를 받는 데는 그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그래도 아이스 카페라떼는 진짜 맛있었다.
거기 들른 일행 중 컵을 두 개나 산 건 나뿐이었다. 그건 출국 전부터 아내에게 받은 지령이었다 — “블루보틀에 들러서 컵 두 개만 사 올래?”. 다만 세부지침은 없었기 때문에 — “니 꺼 하나 내 꺼 하나 사면 될 거 같아.” — 물건을 고르는 건 전적으로 내 몫이었다. 나는 트래블 머그와 커뮤터 컵을 하나씩 골랐다. 얼마에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요즘 한국에서 파는 가격과 큰 차이는 없었을 거다. 다만 당시에는 국내에서 트래블 머그를 팔지 않던 걸로 기억한다.
결혼 초창기에 우리집에 증명된 공식이 하나 있다. 지름신은 아내한테 내리지만 쓰는 건 나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트래블 머그와 커뮤터 컵도 어차피 다 내가 쓸 거라고 확신하며 골랐다는 소리를 하고 싶어서다. 과연 그랬다. 근무 여건상 아내는 완전 밀폐식 뚜껑이 달린 타사의 보온병들을 주로 사용한다. 이 블루보틀 출신들은 사실상 내 거나 다름없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위상에는 차이가 벌어졌다. 내 출근길에 먼저 올라탄 건 하얀 커뮤터 컵이었지만, 붙박이 주전이 된 건 결국 파란 트래블 머그였다. 나는 평일 내내 사무실에서 온갖 음료를 마시는데, 그건 전부 트래블 머그의 차지다. 반면에 커뮤터 컵은 나나 아내가 집에서 커피를 마실 때 2, 3순위로 쓰는 텀블러가 됐다.
기능성, 특히 보온-보냉 능력은 둘 다 훌륭하다. 아침에 뜨거운 음료를 담으면 점심을 먹고 돌아와서 마셔도. 따뜻할 정도. 뚜껑이 완전 밀폐형이 아니라는 걸 감안하면 훌륭한 편이다. 이 제품이 미르(MiiR), 그러니까 보온-보냉 용기 전문 업체와의 협업으로 개발됐다는 걸 충분히 납득 시키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걸 대단한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도 좀 우스울 것 같다. 사실 요즘 출시되는 웬만한 제품들 역시 이만큼은 한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그럼에도 트래블 머그는 내 일상에 착 달라붙었다. 내가 그전에 쓰던 다른 텀블러도 얘한테 밀려났다. 순전히 디자인 때문에.
제일 큰 이유는 닦기 쉽다는 거다. 얘는 주둥이가 넓다. 텀블러들에 비하면 완전히 항아리 수준이다. 이렇게 말하면 하늘로 치솟는 오바 같겠지만, 체감상으로는 정말 그렇다. 왜냐하면 이건 머그잖아. 텀블러와는 다르다, 텀블러와는!(...) 얘를 설거지하는 데 솔은 필요 없다. 수세미와 손이면 충분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호들갑을 떠느냐 하면, 내가 트래블 머그를 사용하는 장소가 회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솔까지 구비할 수 있지. 근데 그건 너무 번거롭고 귀찮잖아. 짐이라면 이미 많단 말이야.
크고 각진 손잡이도 사용하기 편하다. 이건 주로 캠핑용 머그에서 차용하는 형태인 거 같다. 이름이 트래블 머그인 것도 그것 때문인 듯하고 말이다. 손잡이가 넉넉하니 두 손가락으로 지지하는 것도 편하다. 대충 잡고 있어도 손잡이가 손가락 마디에 안정적으로 걸리는 느낌.
그리고 이 파란색, 블루보틀 심벌의 그것과 같은 색, 이걸로 전체를 싹 밀어 버린 게 너무 예쁘다. 사실 처음에 얘네를 살 때만 해도 하얗고 뽀송한 커뮤터 컵 쪽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트래블 머그에 길들여지더라고. 뭐야 나 이쪽이었네, 하고 스스로 납득하고 말았다. 내 책상에 얘만큼 채도가 높은 물건은 거의 없다 보니, 보는 맛을 확 살려 주는 느낌도 있다. 심지어 만 3년 가까이 매일 사용했어도 칠이 거의 벗겨지지 않았다. 손잡이에 약간 흠집이 난 장도?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면 용량이다. 사실 이건 12온스 용기 전부에 해당하는 아쉬움이기도 하다. 이게 약 350ml가 들어가는 정도인데, 특히 여름에 얼음 들어간 음료를 담을 때 딱 10ml쯤 모자라는 느낌이 든다. 늘 뚜껑을 덮기 전에 컵이 꽉 차 버린단 말이야.
한 입 호로록 들이킨 다음에야 뚜껑을 닿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뚜껑이 납작하고, 고무 패킹으로 처리된 부분을 컵에 밀어넣어 밀착시키는 형태다 보니 그나마 작은 용량이 더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
이 문제는 결국 찬 음료용 컵을 하나 더 구비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돌려서 잠그는 뚜껑이라면 안쪽에 공간이 있을 테니 이런 불편이 덜하겠지만, 문제는 그건 아예 내 취향이 아니다. 컵 위로 뚜껑이 이만큼 튀어 나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뵈기 싫다. 사실 그런 디자인으로 나오는 제품 자체가 거의 없는 편인데, 설혹 그런 게 매대에 있다고 해도 눈길을 줄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제 말의 요지는요, 혹시 16온스 사이즈로는 출시 안 하나요…?
이 파란 트래블 머그를 쓰다가 문득 헛웃음이 나오는 때가 있다. 그건 이런 생각과 함께 찾아온다.
"난 이걸 들고 여행을 간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런데 이건 ‘트래블‘ 머그란 말이야. 캠핑장에 자리를 펴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물건이지. 그날을 위해 미리 장소를 찾고, 계획을 짜고, 음식을 준비하고, 몸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 쓰면 더욱 빛날 게 틀림없다고. 물론 내가 이걸 사무실에서 잘, 매우매우 자주 쓰고 있는 건 맞아. 그런데 뭔가 근본적으로 글러 먹었다는 생각이 드는, 이 묘한 패배감은 대체 뭐냔 말이지." 껄껄.
너무 급발진인가? 뜬금없지만, 이런 식으로 현타를 종종 맞고는 한다. 내 얄팍한 안목, 별 계획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쓰는 성격, 이상은 크지만 출력은 굼뜬 습성 따위가 드러나는 듯할 때가 있다. 오랫동안 내 행동에는 이유가 없었다. 나는 대체로 눈앞의 자극에 반응했고, 대체로 운에 의지했다. 스스로가 얄팍하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나를 미워하고는 했다. 이 파란 보온 머그를 쓰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으로 굴러떨어진단 말이야. 이게 '트래블' 머그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묻는다면, 안목 있는 사람이요, 하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걸 물어보는 사람은 딱히 없었지만 늘 그렇게 생각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사건이든, 세계이든, 그게 어디에 적합하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꿰뚫어 보고 싶었던 거다. 아쉽게도 그런 능력은 나한테 없었다. 그보다는 대체로 그런 사람을 만나면 선망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는 역할이 늘 나한테 가까웠다. 뭐 어쩔 수 없지.
여름에는 여행을 가야겠다. 까짓 거 이 파란 트래블 머그도 한번 들고 가 보자. 물론 이 말도 충동적으로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