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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리다 Mar 14. 2022

블루보틀 트래블 머그와 깊이

트래블 없이 트래블 머그를 3년간 사용한 사람 이야기

2019년 6월, 블루보틀 신주쿠점에 들렀다. 도쿄에서 열린 문구-사무용품전(ISOT)을 회사 사람들과 관람한 뒤였다.



이맘때쯤 블루보틀이 한국에 막 진출했다. 블루보틀 성수점은 한국 최고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고, 삼청점은 아직 세상에 없었다. 성수점에 사람들이 매일 몰려 길게 늘어섰고 그 모습은 지상파 저녁 뉴스를 타기까지 했다. 신주쿠점 내의 혼잡함 역시 성수에 못지 않았다. 아니 신주쿠가 원조라고 해야 하나? 아니지. 이거 미국 브랜드잖아. 아무튼 주문하는 줄도 매장 내에서 몇 번이나 꼬여 있었는데, 음료를 받는 데는 그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그래도 아이스 카페라떼는 진짜 맛있었다.



이 컵은 이제 제 겁니다

거기 들른 일행 중 컵을 두 개나 산 건 나뿐이었다. 그건 출국 전부터 아내에게 받은 지령이었다 — “블루보틀에 들러서 컵 두 개만 사 올래?”. 다만 세부지침은 없었기 때문에 — “니 꺼 하나 내 꺼 하나 사면 될 거 같아.” — 물건을 고르는 건 전적으로 내 몫이었다. 나는 트래블 머그와 커뮤터 컵을 하나씩 골랐다. 얼마에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요즘 한국에서 파는 가격과 큰 차이는 없었을 거다. 다만 당시에는 국내에서 트래블 머그를 팔지 않던 걸로 기억한다.

    결혼 초창기에 우리집에 증명된 공식이 하나 있다. 지름신은 아내한테 내리지만 쓰는 건 나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트래블 머그와 커뮤터 컵도 어차피 다 내가 쓸 거라고 확신하며 골랐다는 소리를 하고 싶어서다. 과연 그랬다. 근무 여건상 아내는 완전 밀폐식 뚜껑이 달린 타사의 보온병들을 주로 사용한다. 이 블루보틀 출신들은 사실상 내 거나 다름없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위상에는 차이가 벌어졌다. 내 출근길에 먼저 올라탄 건 하얀 커뮤터 컵이었지만, 붙박이 주전이 된 건 결국 파란 트래블 머그였다. 나는 평일 내내 사무실에서 온갖 음료를 마시는데, 그건 전부 트래블 머그의 차지다. 반면에 커뮤터 컵은 나나 아내가 집에서 커피를 마실 때 2, 3순위로 쓰는 텀블러가 됐다.


사진: 커뮤터 컵(위), 트래블 머그(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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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성, 특히 보온-보냉 능력은 둘 다 훌륭하다. 아침에 뜨거운 음료를 담으면 점심을 먹고 돌아와서 마셔도. 따뜻할 정도. 뚜껑이 완전 밀폐형이 아니라는 걸 감안하면 훌륭한 편이다. 이 제품이 미르(MiiR), 그러니까 보온-보냉 용기 전문 업체와의 협업으로 개발됐다는 걸 충분히 납득 시키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걸 대단한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도 좀 우스울 것 같다. 사실 요즘 출시되는 웬만한 제품들 역시 이만큼은 한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그럼에도 트래블 머그는 내 일상에 착 달라붙었다. 내가 그전에 쓰던 다른 텀블러도 얘한테 밀려났다. 순전히 디자인 때문에.



    제일 큰 이유는 닦기 쉽다는 거다. 얘는 주둥이가 넓다. 텀블러들에 비하면 완전히 항아리 수준이다. 이렇게 말하면 하늘로 치솟는 오바 같겠지만, 체감상으로는 정말 그렇다. 왜냐하면 이건 머그잖아. 텀블러와는 다르다, 텀블러와는!(...) 얘를 설거지하는 데 솔은 필요 없다. 수세미와 손이면 충분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호들갑을 떠느냐 하면, 내가 트래블 머그를 사용하는 장소가 회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솔까지 구비할 수 있지. 근데 그건 너무 번거롭고 귀찮잖아. 짐이라면 이미 많단 말이야.

    크고 각진 손잡이도 사용하기 편하다. 이건 주로 캠핑용 머그에서 차용하는 형태인 거 같다. 이름이 트래블 머그인 것도 그것 때문인 듯하고 말이다. 손잡이가 넉넉하니 두 손가락으로 지지하는 것도 편하다. 대충 잡고 있어도 손잡이가 손가락 마디에 안정적으로 걸리는 느낌.



그리고 이 파란색, 블루보틀 심벌의 그것과 같은 색, 이걸로 전체를 싹 밀어 버린 게 너무 예쁘다. 사실 처음에 얘네를 살 때만 해도 하얗고 뽀송한 커뮤터 컵 쪽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트래블 머그에 길들여지더라고. 뭐야 나 이쪽이었네, 하고 스스로 납득하고 말았다. 내 책상에 얘만큼 채도가 높은 물건은 거의 없다 보니, 보는 맛을 확 살려 주는 느낌도 있다. 심지어 만 3년 가까이 매일 사용했어도 칠이 거의 벗겨지지 않았다. 손잡이에 약간 흠집이 난 장도?


아쉬워요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면 용량이다. 사실 이건 12온스 용기 전부에 해당하는 아쉬움이기도 하다. 이게 약 350ml가 들어가는 정도인데, 특히 여름에 얼음 들어간 음료를 담을 때 딱 10ml쯤 모자라는 느낌이 든다. 늘 뚜껑을 덮기 전에 컵이 꽉 차 버린단 말이야.

    한 입 호로록 들이킨 다음에야 뚜껑을 닿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뚜껑이 납작하고, 고무 패킹으로 처리된 부분을 컵에 밀어넣어 밀착시키는 형태다 보니 그나마 작은 용량이 더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

    이 문제는 결국 찬 음료용 컵을 하나 더 구비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돌려서 잠그는 뚜껑이라면 안쪽에 공간이 있을 테니 이런 불편이 덜하겠지만, 문제는 그건 아예 내 취향이 아니다. 컵 위로 뚜껑이 이만큼 튀어 나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뵈기 싫다. 사실 그런 디자인으로 나오는 제품 자체가 거의 없는 편인데, 설혹 그런 게 매대에 있다고 해도 눈길을 줄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제 말의 요지는요, 혹시 16온스 사이즈로는 출시 안 하나요…?


머그는 예쁘고 나는 얄팍해서

이 파란 트래블 머그를 쓰다가 문득 헛웃음이 나오는 때가 있다. 그건 이런 생각과 함께 찾아온다.

    "난 이걸 들고 여행을 간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런데 이건 ‘트래블‘ 머그란 말이야. 캠핑장에 자리를 펴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물건이지. 그날을 위해 미리 장소를 찾고, 계획을 짜고, 음식을 준비하고, 몸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 쓰면 더욱 빛날 게 틀림없다고. 물론 내가 이걸 사무실에서 잘, 매우매우 자주 쓰고 있는 건 맞아. 그런데 뭔가 근본적으로 글러 먹었다는 생각이 드는, 이 묘한 패배감은 대체 뭐냔 말이지." 껄껄.

    너무 급발진인가? 뜬금없지만, 이런 식으로 현타를 종종 맞고는 한다. 내 얄팍한 안목, 별 계획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쓰는 성격, 이상은 크지만 출력은 굼뜬 습성 따위가 드러나는 듯할 때가 있다. 오랫동안 내 행동에는 이유가 없었다. 나는 대체로 눈앞의 자극에 반응했고, 대체로 운에 의지했다. 스스로가 얄팍하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나를 미워하고는 했다. 이 파란 보온 머그를 쓰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으로 굴러떨어진단 말이야. 이게 '트래블' 머그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묻는다면, 안목 있는 사람이요, 하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걸 물어보는 사람은 딱히 없었지만 늘 그렇게 생각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사건이든, 세계이든, 그게 어디에 적합하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꿰뚫어 보고 싶었던 거다. 아쉽게도 그런 능력은 나한없었다. 그보다는 대체로 그런 사람을 만나면 선망에  눈빛으로 쳐다보는 역할이  나한테 가까웠다.  어쩔  없지.

    여름에는 여행을 가야겠다. 까짓 거 이 파란 트래블 머그도 한번 들고 가 보자. 물론 이 말도 충동적으로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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