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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리다 Feb 28. 2022

지하철과 세 가지 세계

수도권 지하철과 관계하며 자라고, 놀고, 일해 온 삶

매주 제법 많은 시간을 지하철에서 보낸다. 열차에 올라타 출근하고 퇴근하고 놀러 다닌 시간만큼 거기에 익숙해졌다. 신혼 초에 사용하던 2005년식 스포티지를 처분한 후로는, 거짓말을 좀 보태서 지하철 없이 아무 데도 못 가는 수준이나 다름없다. 많은 사람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지하철이 거의 내 다리라고 느낀다. 2018년 어느 날 새벽에 백석동 어딘가에서 온수관이 파열되고 서울로 들어가는 3호선이 운행을 아예 중단했을 때는 그 감각을 동네 단위로 경험하기도 했다. 서울로 출근하려던 수천 명이 목적지를 잃고 지하철역 앞을 배회하던 날이었다.

    돌아보면 나는 인생의 세 국면, 즉 유년기와 청소년기와 현재에 걸쳐 지하철과 관계를 맺어 왔다. 각 때마다 이 공간은 내게 다르게 인식됐다. 유년기에 지하철은 아빠의 일터이자 내 놀이터였다. 청소년기에는 친구들을 만나던 아케이드식 상점가의 입구였다. 그리고 지금은 출퇴근길을 책임지는 지옥철이다. 그동안 지하철은 한 번도 내게 단일한 공간이던 적이 없다. 그건 사소하지만 중요한 문제이고, 내가 두 편에 걸쳐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중 첫 편인 이 글은 비교적 가볍고 뻘한 소리가 난무할 예정이니 모쪼록 마음 편히 읽어 주기를 바란다.


신천역과 일터와 놀이터

지하철은 서울에만 있고 4호선으로 완결된 세계라고 믿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하자. 내 모부는 광주직할시를 떠나 나를 서울 길음동과 국민학교라는 세상으로 데려갔다. 나는 그곳에서 매일 즐거웠다. 동네 친구들과 골목을 뛰어다니고, 다음 호 아이큐점프와 소년 챔프와 보물섬이 발행하기를 기다리며, 길음시장에서 방방을 타고 옆집 형의 앞니를 부러뜨렸다. 강정자 할머니와 그의 자녀가 살며 우리집이 떠나온 광주 및 목포는 금세 흐릿해졌다. 그때 내 지구의 서쪽 끝은 김계향 할머니와 그의 자녀 및 손주들이 사는 인천, 남쪽 끝은 큰아빠와 사촌들이 사는 부산이었다. 명절에만 가끔 그리로 가는 길이 열렸고, 나는 고속도로에서 제철 음식인 우동과 감자를 입에 양껏 밀어넣는 호사를 누렸다. 화장실은 종종 제때 찾아오지 않음으로써 절박함이란 무엇인지를 이 어린이에게 가르쳤다.

    아빠의 일터이던 신문가판대는 2호선 신천역에 있었다. 이제 잠실새내역이 된 그곳은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서 신촌과 구분되지 않았다. 물론 신촌에 갈 일이 없었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가판대는 양철 박스로 만든 1평 남짓한 공간으로, 정면에 큰 창이 나 있었다. 아빠는 하루종일 그곳을 지키며 승객들의 손과 호주머니를 쳐다봤다. 조간신문과 스포츠신문들이 매대에 겹겹이 쌓여 있었고, 손님들은 신문과 잡지와 몇 가지 음료를 부지런히 사 갔다. 나는 주로 아빠가 몰던 하이베스타를 타고 거기에 갔다. 엄마가 아빠랑 교대로 일하는 날이면 길음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기도 했다.


위 이미지는 몸글과 관련이 없습니다.


신천역 승강장과 신문가판대를 드나들며, 나는 시간과 영비천을 마셨다. 신천에 가는 날이면 내게 아빠의 신문가판대는 쉼터였고, 승강장은 놀이터였다. 애지중지하던 야구공을 가지고 놀다 철로에 떨어뜨렸을 때 처음으로 그곳에서 울었다. 스크린도어가 발명되기 전이었고, 야구공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를 빼면 대체로 명랑한 나날이 이어졌다. 지하철이 역으로 진입할 때 내는 굉음이 들리고 검은 터널 너머에서 황색 헤드라이트가 비쳐 오면 내 마음은 늘 즐거웠다. 위이잉, 처컹처컹, 푸쉭, 끼익. 나는 거기서 리듬, 트랙, 믹싱이라는 개념을 감각으로 깨쳤다. 귀가 찢어지지 않을 만큼 적당한 음량만 달팽이관을 때리도록 귓구멍을 손으로 막는 법도 익혔다. 승객들이 열차에서 쏟아져 나오고 그만큼 들어가는 풍경을 멀거니 쳐다보면서.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가끔 궁금했다. 나는 길음동으로 가는데.


신도시 언저리

서울에서 몇 번의 이사와 전직을 거듭하던 모부는 일산 신도시 부근, 엄밀히 말하면 고양시 일산구가 아니라 덕양구에 아파트를 분양 받았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대략 십이 년만에 소위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것이다. 온 가족이 그리로 이사한 후에 지하철은 몇 년간 내 세계에서 사라졌다. 신천역은 아예 영원히 사라졌다.

신도시에서 아버지는 열쇠를 깎고, 남의 집 잠긴 문을 따 주거나 막힌 변기를 뚫는 일로 돈을 벌었다. 대단위 단지가 몇 개씩 모인 아파트 은하단에는 하루에도 수십 개의 대문이 주인의 동의 없이 잠겼다. 이 집 저 집의 변기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대하며 쉼 없이 막혔다. 아버지의 수입은 꽤 꾸준했다. 한편 운전면허를 취득한 어머니는 동네에 새로 개업한 개신교 교회에서 유래없이 젊은 권사로 임직했다. 교구를 맡은 웬만한 큰 교회 부목사들 저리 가라 할 만한 활동량을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무시무시한 분량의 새벽 제단을 쌓기까지 했다. 모부 두 사람 다 부지런했다. 한심함을 맡은 건 나였는데, 나는 동네 이곳저곳에 멀끔히 문을 연 종합학원들에 학원비를 갖다 바치는 조건으로 따뜻한 히터 바람 아래에서 합법적으로 하품을 했다. 세 식구의 삶은 그렇게 서울을 잊고 신도시 안에서 순환하며 자생하는 듯했다.


의정부역과 아케이드들

IMF와 고등학교는 지하철을 내 삶으로 다시 끌어들였다. 외환위기와 구제 금융, 기업 줄도산 소식이 매일 TV 뉴스를 절반 이상 먹어치웠다. 신도시의 상가에 날마다 공실이 발생하고, 가게를 비운 이웃들은 어디론가 떠났다. 오락실에서 시간을 죽이는 아빠를 발견했다던 한스밴드의 노래 속 화자는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제법 많은 사람이 가게와 회사와 책상을 비우고 저승으로 떠났으니까.

    한편 가세와 미래를 의논하던 모부는 집을 팔고 다시 월세살이를 시작했다. 점점 작은 집으로 이사하던 끝에, 마침내 그들은 신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모부를 따라 나도 의정부로 가야 했다. 정든 친구들과 헤어져 생판 모르는 도시로 떠난다는 의미였다. 큰아버지 일가가 부산을 떠나 조만간 그리로 합류할 계획인 듯했다. 이 거대한 흐름 앞에서 나는 화장실 문을 잠그고 엉엉 울었지만, 얼마전에 집 곳곳에 빨간 딱지가 붙는 등 상황이 심상찮아 보였으므로 적당히 눈치껏 행동하기로 했다. 농성은 반나절을 넘기지 않았다. 이삿짐을 맡은 게 포장이사 업체였는지 용달차 기사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짐과 함께 출발해 의정부에 이르는 데는 1시간 남짓 걸렸다.

    의정부 도심은 지하철역과 미군 기지를 중심에 두고 두 덩이로 나뉜 채였다. 또한 재래시장 및 쇼핑가가 역과 맞닿아 있었고, 거대한 미로식 상가 아케이드도 지하에서 번성했다. 동네에 적응을 마친 나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거기를 나다녔다. 하교 후에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역 부근을 쏘다니며 노래방에 가고, 옷과 신발과 떡볶이를 샀다. 지하철을 타고 도봉으로, 노원으로, 수유로, 혜화로, 종로로, 신촌으로 놀러가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났다. 가끔은 큰 맘을 먹고 강남이나 분당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위 이미지는 몸글과 관련이 없습니다.



현지의 수많은 아케이드식 상가와 쇼핑몰과 노래방을 방문하고, 돈과 악을 쓰고, 이 노래방은 태진 기기를 쓰는지 금영 기기를 쓰는지 확인하는 게 나의 즐거움이었다. 방학을 맞으면 아예 일주일에 일곱 번씩 친구들과 스케줄을 맞춰 지하철을 타고 노래방에 갔다. 걸핏하면 태진 노래방을 추켜 세우고 금영 노래방을 비난했다. 나중에는 아예 노래를 업으로 삼겠다며 실용음악과 입시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학원은 노원에 있었으니, 당연히 매일 지하철을 탔다.


고도로 발달한 출근길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노래보다 야훼를 사랑했고,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는 전도사가 됐지만, 그 후에는 목사가 아니라 회사원이 되기로 했다. 졸업과 입학과 입대와 전역과 편입과 입시와 결혼과 취업 활동을 경유하는 동안 내가 사는 지역은 내 진로처럼 계속 바뀌었다.

    내 유년기의 놀이터였고 청소년기의 사교장이던 지하철은 이제 출근길이 됐다. 이 거대한 교통수단은 지옥철이라는 무시무시한 별칭을 달고, 수도권에만 10여 개의 다리를 뻗친 채 아침저녁으로 수많은 사람을 퍼나른다. 인터넷에서 언젠가 “고도로 발달된 출근길은 황천길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천재적인 경구(?)를 본 적이 있는데, 처음 그 말을 한 사람은 현자이거나 10서클 대마법사임에 틀림없다. 열차는 늘 사람으로 가득하다. 거기서 한두 명쯤은 실신하거나 골로 간다 해도 통계적으로 이상할 일은 아니다.

    정시 도착, 정시 발차는 그 많은 사람들이 출근길 지하철에 기대하는 최대의 미덕이다. 아침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제 시간에 일터에 도착할 요량으로 이미 꽉 찬 열차에 자기 몸을 욱여넣는다. 나도 그렇다. 분 단위로 짜인 출근 동선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려면 제 때 와서 제 때 출발하는 열차에 재깍재깍 올라타야 하기 때문이다. 출근길은 매일 환승에 환승에 환승을 더해서 반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나에게 있어서 성공적인 출근은 마을버스와 지하철과 내 다리가 얼마나 잘 협업하는지에 달려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단 시간을 계산한다. 씻는 시간, 마을버스에서 지하철 개찰구를 지나 열차로 환승하는 시간, 지하철의 다른 노선으로 환승하는 시간, 회사 근처 역에 도착해 현관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머릿속으로 조합한다. 이 계산에는 당연히 내 달리기 능력도 포함된다. 근 1년간 달리기 능력이 향상되면서 바뀐 게 있는데, 그건 내가 아침에 5분쯤 더 잔다는 거다. 좀 더 일찍 일어나거나, 체조를 하는 따위의 자기계발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튼 50분에 대문을 나서면 다소 이르고, 정각에 나가면 안전하며, 3분은 적당, 5분은 아슬아슬하다. 8분부터는 들어오는 마을버스가 직장행인지 저승으로 향하는지를 판단하고, 내 출근길이 최대한 이승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시간을 달려야 한다. 이때부터는 다리가 힘을 많이 쓴다. 쌔가 빠지게 뛰어야 한다는 뜻이다. 가끔 여유롭게 나갔다가 마을버스에게 배신당하기도 하는데, 뭐 괜찮다. 그건 다리가 오후치 체력을 당겨 쓰면 커버할 수 있는 정도의 리스크니까. 이런 계산이 서기 때문인지, 요즘도 나는 매일 아침마다 5분씩 늦게 일어나 과거의 나를 욕하며 열심히 달리고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그러나 지하철은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초인이 아니므로 달음질로 열차를 대체할 수 없다. 연착이나 운행 중단이 벌어지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상사에게 연락하는 것뿐이다. “죄송한데 지하철에 문제가 생겨서... 조금 늦을 상황입니다.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뭘 어떻게 해서 빨리 갈 건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보고한다.


열차가 멈추면

가끔 정시에 열차가 들어오지 않는다. 또는 내가 간신히 올라탄 열차가 깜깜한 터널을 통과하던 도중에 갑자기 멈춘다. 사람들은 불안해하거나 화를 낸다. 곧 안내방송이 뒤따른다. 대체로 앞 차의 신호를 기다려야 한다거나, 차량에 고장이 발생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가끔 이런 방송이 나오기도 한다. “금일 OO역에서 발생한 장애인 시위로 인해 운행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는다. 상사에게 연락한 후 내 몸이 인파에 밀려 찌그러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이 짧은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자고 마음 먹는다. 이건 마음을 넓게 먹는다거나, 아량을 베풀겠다거나, 온화한 시선으로 저 시위자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다.


위 이미지는 몸글과 관련이 없습니다.


어린 날 내 아빠의 일터였고, 내 유년기의 놀이터였으며, 청소년기에 나를 친구와 연결하던 이 지하철이, 그리고 오늘 나를 일터로 보내는 이 교통수단이, 다른 누군가의 생사를 가르는 첨예한 공간이기도 하다는 걸 이해한 탓이다.

    2017 10월의 일이었다. (계속)


(“지하철과 수치심”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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