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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이방인2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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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구년생곰작가 Jul 22. 2024

가난한 자들의 외침






조합에서는 어용 노조에 맞서기 위해 신입 조합원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도 큰 관심을 보였다.



작년 회사에 들어온 현장 실습생 중 정규직 사원으로 전환된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같이 회사에 현장실습생으로 채용되었던 또래 친구들은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 수능을 준비하거나 대학 입시를 준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갓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린 친구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내가 남아 있는 이유는… 철민이의 죽음에 대한 부채 의식 때문이었다. 간간히 집으로부터 안부를 물어오는 메시지가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마음속 부채의식이 이 감옥과 같은 공장에 머물게 하였다.



한편 노동조합사람들은 철민이의 억울한 죽음과 관련하여 관심이 많았다. 명백히 산업재해로 인한 사고이지만 산재 처리를 받지 못한 사건. 그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사건을 모두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건 당시 침묵했던 그들의 갑작스러운 관심이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나를 불쾌하게 했다. 철민이의 죽음을 말하며 노동자의 권익에 대해 이야기하는 조합직원들에게 분노가 일었다. 나는 그들의 관심에 더욱 냉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부서 회식이 있던 어느 날.


뜻밖의 손님이 방문하였다. 노조 지부장이었던 박태일이 회식 자리에 찾아온 것이다. 과장과는 안면이

있는 사이로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잘 지내시죠.?”

“요즘 회사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데, 라인은 잘 돌아갑니까.? “

“아직도 급여를 제때 지급받지 못한 직원들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웅 그렇지. 회사 사정이 안 좋으니, 직원들이 열심히 일해서 회사가 커지면 뭐 하겠나.?!”

“회장은 자기 회사인 것처럼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데. “

“직원들이나 주주들 눈치 안 본 지 오래되었네.”

“이사들도 뭐 회장의 말이면 죽는시늉이라도 하는 판국이니. “

“나도 언제 거리로 나 앉게 될지 몰라서 불안하네.”



"그렇군요." "저희가 조금만 더 일찍 관심을 가졌더라면 하는 후회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전임자 문제로 말이 많았지요."

"여러 가지로 다시 재정비하는 중이지만 예전만큼 직원들 및 조합원들의 공감을 얻기가 힘들 것 같네요."



"그런가. 사람 사는 일이 뭐 다 좋지만은 않지. 그런다고 힘든 일만 있는 것도 아니네."

"추운 날 이렇게 회식자리까지 찾아줘서 고맙네."



"네 감사합니다."



어두운 술집의 미끄러질 듯한 나무 바닥과 벽에 걸린 낡은 사진들이 마치 이곳의 시간의 흐름을 멈추게 한 것 같았다. 과장은 어느새 빈 술병을 두 개나 쌓아두고 있었고,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회식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흥겨웠고, 다른 동료들은 웃음소리와 함께 잔을 부딪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내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박 지부장이 조용히 다가와 내 옆에 앉았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보며 몇 번의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주변 직원들로부터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친구의 죽음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지요."

"저희가 전임자 문제로 인해서 사고 당시에 어쩔 수 없이 침묵하게 된 점 미안합니다."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왜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지금 나에게 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소주를 술잔에 따르며 말을 이어갔다.



"그 사고 정말 충격이 컸습니다. 그러한 일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지요."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안타까운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여기는 회식 자리예요."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는 거잖아요."



박 지부장은 고개를 숙이며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도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건 압니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를 언제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알 수가 없어서요."

"열악한 환경과 부당한 대우에 맞서서 우리의 권리를 찾아야 합니다."

"이번에 조합에 가입하셔서 함께 싸워보는 건 어떠십니까.?"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술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기분은 이미 망쳐졌고, 나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나는 일찍 자리를 떠났다. 밖으로 나와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철민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항상 밝고 활기찬 친구였다. 그의 억울한 죽음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였다.



박지부장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어느덧 가슴속에는 가난한 자들의 외침에 외면하지 말라는 뜨거운 울림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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