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 사무실에 들어온 나는 책상 위의 서류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책상 위에는 더 이상 의미 없는 조합의 회의록과 사건 기록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노동조합 지부장 박태일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조합은 와해되었고,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나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다. 조합의 정신적 지주였던 박태일이 사라진 지금, 남은 조합원들은 한 명씩 떠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중년의 남자는 차분하지만 단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예전 박태일 지부장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구면이죠.?"
"노동철 변호사님.?"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박태일 지부장이 평소 늘 존경하던 노동인권 변호사, 노동철이었다. 박태일과 함께 수많은 투쟁과 협상에서 함께 했던 인물이었고, 저번 회사 로비 앞 농성장에서 만났던 적이 있었다.
"많이 바쁘실 텐데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또 병원도 들렀다 오는 길이에요. 많이 힘드시죠.?"
"박태일 지부장의 사고는 저뿐만이 아닌 많은 분들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조합 사무실에 사람들이 없군요. 그 사고 이후로 많은 분들이 떠난 것으로 압니다만, 역시나 그렇군요."
"박태일 지부장에게는 들었습니다. 친구의 죽음...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어른들이 참으로 미안할 따름입니다."
"회사와 어머니 사이에 합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죠. 성민 군의 죽음, 그것이 정말 단순한 사고였을까요.?"
나는 그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성민이의 죽음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게 있었다. 하지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중에 노동철 변호사는 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저와 함께 그 사건의 진실을 밝혀 보시죠. 친구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 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밝혀내야 합니다.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변호사님의 말에 마음속 잠들어 있던 의지가 깨어났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나와 노동철 변호사님 그리고 조합원 몇몇은 성민이의 사고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먼저 우리는 당시 사건 조사를 담당했던 경찰서를 찾았다. 경찰 기록에는 사고 당일의 승강기 상태와 성민이의 위치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지만,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이 누락되어 있었다. 노동철 변호사는 경찰서에서 사고 당시 상황을 재검토하고, 수사관들과 면담을 하며 누락된 부분을 하나하나 확인해 나갔다. 나는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노동철 변호사의 끈질긴 열정에 감탄했다.
다음으로, 우리는 사고 수습을 담당했던 소방서를 방문했다. 소방서에는 사고 직후 성민이의 시신을 수습할 당시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구급대원들은 사고의 원인이 승강기의 오작동이라고만 설명했을 뿐, 구체적인 정황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노동철 변호사는 구급대원들을 설득해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듣고, 작은 단서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영상이 담긴 CCTV였다. 성민이의 사고 당시 승강기 주변에 설치된 CCTV에는 사고의 모든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가능성이 컸다. 두 사람은 회사의 안전관리 부서를 찾아가. CCTV 영상 확보를 요청했다. 하지만 회사 측은 보안상의 이유를 들며 협조를 꺼렸다. 그들의 눈빛에는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한 불안감이 비쳤다.
노동철 변호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나와 함께 보안부서와 시설관리 부서를 직접 찾아다니며 영상 확보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였고, 필요시 법적 절차도 밟겠다는 그의 단호한 태도에 결국 그들은 CCTV 영상을 제공했다.
영상을 재생하자, 화면 속에는 성민이가 승강기 앞에 서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승강이 버튼은 빨간색 불이 깜박였고, 분명 정지 상태로 놓여 있었다. 그러던 중 성민이가 승강기에 들어가려는 찰나 갑자기 화염이 깜빡이며 검은색 연기로 승강기 내부가 뒤덮였고, 이내 CCTV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영상에는 승강기의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채 오작동을 일으켰고, 지하로 승강기가 추락하는 것으로 보였다.
"보세요.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닙니다. 승강기가 분명히 오작동한 것이고 산업재해로 인한 억울한 죽음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회사의 승강기 관리 소홀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무거운 마음을 다잡았다. 성민이의 억울한 죽음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였다. 노동철 변호사 그리고 지금은 의식불명 상태로 병상에 누워있지만 박태일 지부장도 늘 함께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나와 성민이 그리고 공장의 노동자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우리에게 분명 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성민이의 죽음을 제대로 세상에 알리고 회사의 부당함을 알려야 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였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고, 그리고 그 길 끝에 진정한 정의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