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집살이

안 해도 될 일이었는데…

by yangTV

내 아버지의 운명도 참 기구하다.


아버지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아직 할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할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시고 만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한 순간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혼자서 아이를 낳아야 했을 내 할머니에게는 분명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꼭 그래야 했을까? 갓 태어난 내 아버지를 그렇게 매몰차게 버려야 했을까? 할머니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내 아버지를 멀리 떨어져 있는 고모할머니에게 맡겨 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자식을 버린 것이다.


물론, 그 당시 할머니에게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정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 사정을 나로서는 헤아릴 수 없으니, 당시 할머니의 그런 선택을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할머니의 그 선택으로 내 아버지는 이유도 모른 채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가 고모할머니 댁으로 갔을 때, 고모할머니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 후 한 명씩 낳기 시작했고, 결국 다섯 명의 아이를 낳게 되었다. 아무리 내 아이처럼 소중히 키웠다고 해도, 자신의 자식만 할까? 당연히 아버지는 자라는 동안, 고모할머니나, 할아버지, 그리고 사촌 동생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아버지를 포함해서 여섯 명의 아이를 키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무리 어렸다 해도 그런 사정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알게 모르게 나타나는 고모할머니나 할아버지, 그리고 사촌 동생들의 눈빛 속에서 분명 부모 없는 외로움과 서러움을 느꼈지 않았을까? 설사 그분들이 말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버지는 학교에서 준비물을 가져오라고 선생님이 이야기해도 차마 고모할머니에게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얼마나 눈치를 봤을지 상상이 간다. 마치 외딴섬에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 않았을까? 결국,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그 어린 나이에 고모할머니 댁을 나와,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랬다 해도 10년을 넘게 키워준 정을 그리 쉽게 잊을 수 있을까? 부모가 못해준 정을 주신 분들인데… 연어가 강을 거슬러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듯이, 아버지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부터 고모할머니를 찾아갔다. 그리고 마치 부모님을 모시듯이, 친동생들을 대하듯이 그렇게 대했다. 자신을 버리고 연락 한번 없는 부모보다, 키워준 그분들에게 더 정이 갔을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그분들이 이미 친부모였고 친동생들이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에게 고모할머니 댁은 단순한 친척이 아니라 시댁이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매년 생신이나 명절 때면 항상 고모할머니 댁으로 갔다. 어머니는 고모할머니를 시어머니로 모셨고, 사촌 동생들은 시동생으로 대했다. 아버지는 항상 그분들에게 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도와주고, 사촌 동생들도 내 아버지를 형이나 오빠로 대했다.


나도 고모할머니 댁에 가는 것이 좋았다. 당시에는 아무도 결혼을 하지 않아서, 아이라고는 오직 나 밖에 없었다. 당연히 맏이로서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명절 때 고모할머니 댁에 가면, 공장에서 일하던 고모들이 항상 용돈을 두둑하게 주고는 했다. 같이 손을 잡고 마을 주변을 여기저기 산책하기도 했고, 삼촌들은 목마를 태워 주기도 했다. 난 그 집의 귀염둥이였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불만은 있었다.


명절에 고모할머니 댁에 찾아가면, 항상 명절 음식 준비는 어머니와 고모할머니의 몫이었다. 거기에 고모가 셋이나 있는데도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한가하게 쉬고 있는데, 어머니는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며 음식을 만들었고, 손님들이 오면 술상을 차렸고, 설거지를 했다. 물론 고모들도 가끔 도와주기는 했지만, 내 눈에는 내 어머니만 일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난 너무도 화가 났다.


더 화가 나는 것은, 그렇게 온갖 일들을 도맡아 하시면서도 항상 웃으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고모할머니도 좋았고, 고모들도 삼촌들도 모두가 다 좋았지만, 항상 어머니만 일하는 것 같아서 나는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것은 너무도 부당하게 느껴졌다.


“왜 엄마만 일해? 엄마도 일하지 마! 어서 엄마도 쉬어!!”


난 너무도 화가 나서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울면서 소리쳤다. 제발 어머니도 일하지 말고 쉬라고 그렇게 소리치면서, 부당함을 호소했다. 그때가 아마도 내 나이 열 살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때 어른들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귀여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자기 어머니를 보호하려고 조그만 아이가 온 힘을 다해 떼를 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내 외침을 듣고, 고모들이 웃으면서 다가와서 나를 달래더니, 내 어머니를 도와주기 시작했으니까. 어렸던 난, 고모들의 그 모습에도 완전히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에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기로 했다.


예순 살이 넘은 지금도 어머니는 고모할머니 댁을 시댁으로 여기고 있다. 세월이 흘러 고모할머니 댁에도 며느리가 들어오고 사위들이 생겼음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명절 때면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부엌으로 가서 음식을 만들고, 손님을 치르고 있다. 그런 모습을 너무도 오래 봐와서 그런지, 그런 어머니의 모습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어머니는 그 집에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손님일 뿐이다. 일을 도와주어야 할 의무는커녕, 오히려 극진히 대접을 받아야 하는 손님 말이다.


내가 어머니에게 시댁도 아닌데 그렇게 할 필요가 있냐고 어머니에게 얘기를 해 봤지만, 어머니는 고모할머니가 너무나 당신에게 잘해 주셔서 그저 고맙다고 했다. 같이 어울려서 음식을 만들고, 북적이는 집안에서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머니는 좋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런 어머니를 조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시댁도 아닌 곳에 가서 일부러 사서 고생을 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에게는 자식을 버린 할머니를 대신하는 고향이었고, 어머니에게는 당신도 남과 다르지 않다는 증거였음을…


만약, 고모할머니 댁이 없었다면, 어머니가 보내는 명절은 어땠을까? 모르기는 해도, 평소보다 조금은 더 쓸쓸했지 않았을까?


이웃들이 고향을 찾아 내려갈 때도 그저 아이들과 함께 집에 있어야 했을 것이고, 고향에 내려가 사람들과 어울려 송편을 빚고 전을 부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고향집에서 짐을 잔뜩 싸 들고 하나 둘 돌아오는 이웃들의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시댁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저 듣고 있기만 해야 했을 것이다.


명절에 가야 할 곳이 없다는 것.

그래서 남들과 다른 명절을 보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복에 겨워서 하는 소리로 느낄지 모르지만, 홀로 짐을 짊어지고 있던 어머니에게는 어쩌면 더 큰 외로움을 의미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렇게 환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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