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육아, 경력은 사라지고 남은 건 다시 신입
철없이 해맑고 두려움이라곤 일도 없던 10대. 그때 나의 꿈은 무대 위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연극배우였다. 얼굴도 몸매도 1도 자신 없었지만 무대 위에서 다른 사람으로 산다는 건 내겐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매력 그 자체였으므로.
마음도 귀도 얇아 빠진 20대. 현실과 타협하며 연극은 멀어지고 그나마 책을 좋아했던 나는 전문대 출판학과를 졸업했다. 홀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의무와 꿈과 멀어진 현실은 돈부터 긁어모아야겠다는 마음 하나만 남았다. 출판사와 신문사의 신입 사원으로 입사해 멋진 미래를 꿈꿨지만 구인광고에 터무니없이 낮은 연봉은 당장 생계를 도와야 했던 내게 사치였다. 오늘만 사는 게 중요했던 그때 커리어를 쌓기보다 적당히 괜찮은 월급을 주며 집과 가까운 회사를 선택했다. 신입치고 '이 정도 월급? 나쁘지 않지!'라며 만족했다.
말만 하면 알 수 있는 회사. 월급은 평균 신입사원 월급 보다 조금 높았고, 얼마가지 않아 비서로 취직한 나는 인사팀으로 전환배치. 낯선 업무들은 힘들고 막막했지만 젊은 패기로 야근을 밥먹듯이 하며 경력을 쌓아갔다. 퇴사를 노래했지만 시간은 나에게 3년이라는 경력을 허락했다. 회사생활은 만만치 않았지만 일을 통해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느끼며 자신감 넘치던 시간을 보냈다. 한해 한해 더해지면서 나의 경력은 다른 곳에 이직할 프로필 한 줄에 추가되었고 제조, IT, 도소매 회사들을 거치며 인사, 총무, 회계, 경영관리 한마디로 다양한 업무의 경력이 나이테처럼 늘어갔다. 족히 회사 경력만 10년이 넘었고, 회사에서도 맡은 업무는 책임지고 해내는 직원으로 사장님들에게도 인정받으며 달려왔다.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결혼 후 나의 삶은 남편과 다르게 180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이를 낳고 육아에 치여 취직은 꿈도 꾸지 못 했다. 나의 경력은 자연스럽게 물경력으로 흘러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쯤이야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매년 나이를 먹어가면서 마음은 불안감이 쌓여갔다. 아이는 내 품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고, 자주 아픈 친청엄마를 모시며 살았던 시간들도 너무 감사했지만 그 이면에는 '다시 취직할 수 있을까?', '갈 수 있는 회사가 있을까?', '취직해도 과연 예전처럼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꼬리의 꼬리를 무는 걱정들에 치여 자존감이 점점 바닥을 뚫고 지하 땅굴 속을 비집고 기어들어갔다. 끌어올릴 힘조차 없이 매일 육아와 가사에 치여 체력은 마이너스, 의지도 제로의 연속이었다.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았다. 미친 듯이 이력서를 넣었다. 이력서를 30군데 이상 족히 넣고 얻은 기회. 아이가 어린이집을 가기 시작하면서 탄력적 근무가 가능 한 곳에 운 좋게 취직했다. 기쁨은 잠시였다. 결혼 후 한동안 일 하지 않았던 난 공황장애가 올 정도로 벅찬 업무에 지쳐갔고 불안도가 높은 성격으로 육아, 가사, 회사 일까지 해내려니 매일이 벅찼다. 육아를 하며 몇 년을 집에만 있던 내가 다시 사회로 돌아가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출, 퇴근하는 길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숨이 턱턱 막히고 눈앞이 캄캄했다. 식은땀이 나고 어지러웠다. 그렇게 꾸역꾸역 1년을 버텼다. 퇴근하던 어느 날 노을이 지는 하늘을 보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었다. 창피함은 개나 주고 나는 살아야겠으므로. 고심 끝에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힘들게 하는 그곳을 빨리 그만두세요!".라고.
살고 싶어서 결국 사직서를 냈다. 비로소 숨이 셔졌다. 아직은 아이 곁에 더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재취업은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회사에서 도망친 솔직한 나의 심정은 '두려움'이었다. 회사에서 실수하는 내가 익숙하지 않았고, 서른 중반에 영혼을 갉아가며 일을 해야 하나... '나의 경력은 이제 어디에서도 먹히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니 어떤 회사에도 입사할 자신이 없었다. 면접을 보러 가서도 겁나서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 그대로 줄행랑을 친 적도 있었다. 취직이 두려웠던 또 다른 이유는 아이에게 할애했던 자유로운 시간들이 회사에 저당 잡혀야 한다는 것. 일 할 자신이 없으니,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수많은 이유를 찾고 또 찾았다. 그렇게 마흔이 넘었다.
어느새 불혹. 엄마를 찾던 아이는 친구를 더 좋아하게 되었고, 학원과 인터넷 세계를 더 찾게 되었다. 사랑스럽던 모습은 사춘기라는 그림자 뒤로 숨었다. 마주치기만 하면 싸우는 모녀의 모습에서 처음으로 집을 떠날 수 없으니 회사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대로 집에만 있을 수 없음을. 이제는 아이의 교육비와 나의 당당한 미래와 한없이 낮아진 자존감을 찾기 위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해야 할 적기라고.
취업을 결심하고 처음 시도 한 것이 사이버 대학 편입이었다. 졸업까지 2년. 사회복지사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때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한 달가량의 9 to 6 사회복지사 실습 하게 되었고, 결혼 전처럼 근무가 가능한 내 모습을 발견했다. 전업주부가 다시 취직하기 전까지 가장 두려운 것이 풀근무에 대한 부담감이다. 이 부담감을 이겨내니 어느 회사라도 당장 취직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있으나 마나 한 물경력 따위는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 보자는 용기가 생겼다.
나이는 팀장급인데 경력은 쌩초보급. 경력과 관련된 일은 도저히 자신이 나지 않아 무관한 직종의 회사 파견직으로 1년을 근무했다. 참 희한한 일이다. 몸이 먼저 알았다. '지금이 바로 일할 타이밍'이라는 걸. 출근이 즐거웠고 마흔이 넘는 신입이어도 다시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함까지 더해졌다. 정규직이 되어야겠다는 욕심도 생겼다. 제대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곳으로 이직해 45세까지 나의 JOB을 갖기로 마음먹고, 이곳 회계 사무실에 다시 신입으로 입사했다.
'자신의 선택은 겸허히 받아들이고 책임지자!', '후회는 개나 주고 오늘만 산다!' 나의 인생 모토.
하지만 현실은 상상 그 이상이었고 현타는 언제나 찾아왔다. 매 순간 닥치는 불합리함, 갈등, 낯선 업무... 모든 게 너무 괴로웠고 도망치고 싶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신입을 뽑았는데 경력자라고 착각을 하는 건가 싶은 의심까지 들었다. 난 매일 퇴사를 꿈꾸지만 서른도 아닌 마흔넷. 취업의 문은 좁아졌고 스펙의 문턱은 높아졌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
퇴사는 현실과 동떨어지고, 신입이 또 다른 회사에 신입으로 갈 수 없다는 결론. 좀 더 버텨보자! '회사야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이런 마음으로 그동안 내가 경험한 흔적들을 주관적인 시점에서 편하게 글로 나누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마음이 복잡할 땐 글쓰기만큼 좋은 약은 없기에.
때로는 격하게 때로는 웃픈 이야기들을 함께 해주는 분이 있다면 퇴사 마려운 회사 생활도 단약 먹는 기분으로 버텨낼 수 있으리라. 오늘 이 글을 읽고 있는 단 한 분이라도 좌절하거나 힘들어하고 계시다면 나와 함께 용기 내어 앞으로 함께 나아가길 바라본다.
<매주 토요일 꾸준한 글쓰기를 위해 강제 연재를 시작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솔직하게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