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만 하다 취직하려니 겁나고 무서웠던 그때의 나
3년 전만 해도 걱정부터 앞서는 바람에 취업은 꿈도 꾸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을 내 아이를 낳았을 뿐인데.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돌보는 시간 동안 나의 경력은 멈춰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주부였고, 엄마였던 것처럼. 지금은 일을 시작한다는 게 겁낼 것도 무서워할 것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그때 나는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과 불안으로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웠다.
남편은 회사 핑계와 출산 후 대화단절로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고,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댔다. 태어나서부터 예민한 아이는 2살이 되기 전까지 등에 센서가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해 쉼 없이 나를 괴롭혔다. 우는 아이를 침대에 눕혀두고 생각했다. '혹시 너!! 나를 괴롭히려고 태어났니?'. 내가 낳은 내 새끼지만 마치 내게 주어진 짐덩이처럼 느껴졌다. 육아에 지쳐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뇌하수체 이상으로 인해 호르몬에 문제가 생겨 모유는 일반인에 비해 2배 이상 만들어졌다. 병원에서 세 쌍둥이가 먹어도 남을 정도였으니. 아이에게 쉼 없이 모유수유를 해도 차고 넘치는 모유 때문에 유선염을 달고 살아야 했다. 단유까지 8개월의 대장정.(모유량이 많아 단유가 되지 않음) 수유복에 항시 새어 나오던 모유 때문에 집 밖은 나서지도 못하는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갔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자신감은 사라졌다.
결혼 전 쉽게 기죽지 않던 나의 모습은 며칠째 감지 않아 떡진 머리와 젖비린내 나는 옷들에 싸여 어느새 의욕 없는 여자만 남았다. 외벌이로 벌어오는 월급은 4명(장모까지)을 책임져야 했기에 잔고를 확인할 틈 없이 사라졌고, 나는 자연스럽게 남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어쩌다 배달된 택배 상자를 남편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마음속으로는 '일도 안 하면서 집에서 돈이나 축내고 있네!'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사랑해서 결혼했던 우리였는데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갔다. 대화는 자연스레 줄었고, 각자의 시간은 늘어갔다.
이때 우린 아픈 친친 정엄를 모시며 처가살이 중이었다. 친정엄마를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내가 일을 시작했어야 했지만 아픈 엄마에게 아이를 맡긴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3시간 근무하는 아르바이트도 시작했지만 시간대비 돈이 되지 않았고 일하는 그 짧은 시간에도 온통 아이 걱정에 오래가지 못했다. 모든 상황이 '너는 일을 해야 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집밖으로 나가 결혼 전처럼 일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어느새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있었다. 아이는 성장했고 남편과 난 어느새 마흔 언저리에 도착해 있었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 JOB을 찾아야겠다는 것. 하지만 지나간 시간 속에 내 경력은 연기처럼 사라져 흐미해졌다.
그렇다고 아이가 6학년이 될 때까지 집에서 마냥 놀기만 한건 아니었다. SNS 광고에 차고 넘치듯 소위 월 1,000만 원을 꿈꾸지만 넘사벽. 월 100만 원이라도 벌고 싶다는 마음으로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며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시작했지만 세상에 쉽게 돈을 버는 일은 없다는 걸 알았다. 유아동 실내복 공구도 시작했지만 오히려 마이너스와 사기 피해로 두부멘털은 으깨지고 무너졌다.
무엇을 시작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만 존재하는 것 같아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사기로 인해 200만 원 가까이 돈을 날렸을 땐 남편 앞에선 죄인처럼 기가 죽어버렸다. 하지만 그때 내가 놓치지 않은 것이 바로 독서였다. 하염없이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노트에 내 생각들을 끊임없이 쓰면서 나를 돌아봤다. 이대로 살 순 없었다. 숨 막히고 하염없이 우울했다. 지금보다 한 뼘이라도 더 나은 나로 살기 위해 자기 계발서와 심리해 도서를 닥치는 대로 읽으며 생각했다. 지금 당장 내가 무엇부터 시작할 수 있을지.
내 나이 어느새 마흔이 넘었다. 애매하게 경력은 길지만 '나 이거 잘합니다!'라고 내세울만한 능력은 없었다. 오히려 결혼 전 경력으로 이력서를 넣는다면 과장급으로 입사를 해야 하는데 머리에 남아있던 직무 경험조차 가물가물했다. 있으나 마나 한 경력은 어느 회사에도 내밀 수 없었다. 당연히 경력 관련 회사에 이력서를 냈지만 전화는 단 한 통 없었다. '지금처럼 살기 싫으면 이제는 내가 변해야 한다. 경력을 버리고 신입으로 다시 시작하자!.' 이렇게 마음먹으니 새삼 어렵고 두려울 게 없었다. 사람이 마음먹기까지 종이 한 장 차이처럼 의지가 생기니 뭐라도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무엇부터 시작하지?.... 그때 운명처럼 탈출구가 나타났다.
그 시작은 아파트 단지에 홍보차 나온 사이버대학 관계자와의 상담이었다. 주부도 직장인도 모두 졸업과 자격증 취득까지 가능하고 더군다나 국가장학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에 '그래! 공짜라면 이거부터 시작하자!'라고 결심했다. 남편한테 돈 달라고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아도 되고 실버 시대로 향하고 있는 지금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한번 마음먹으니 그다음은 속전속결. 사이버 대학에 편입으로 입학했고 국가장학금으로 졸업까지 2년. 그 안에 나는 쉬지 않고 남편 회사에서 잡일부터 일을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회사에서 인스타를 찍고, 물건을 포장하고, 남는 시간에 공부를 했다. 비록 이때도 풀근무는 상상하기 힘들어 오전에 일을 끝내고 아이가 하교하기 전 집에 도착했다. 그렇게 2년 후 사회복지사 자격증, 요양보호사를 취득하며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세상 속에 물들지 못해 도망치고만 싶던 삶이 너무 숨 막히고 우울했다. 이대로는 살 수가 없어서 무엇이라도 시작해보고자 한 이 작은 시작은 또 다른 출구로 나갈 수 있도록 용기와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그래서 내가 '사회복지사로 취직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아쉽게도 그건 아니 옳시다.
지금의 난, 돈관리 하는 회계는 절대로 하지 않으리 마음먹었지만 씻고 벗고 해 본 경험이 이것뿐이라 결국 돌고 돌아 회계 관련 일을 하고 있다. 회계 관련에서 더 나아가 세무회계 사무실 신입 1년 차가 되었다. 이대로 살 순 없어서 뭐라도 시작했던 3년 전. 그리고 지금. 결국 자신의 환경을 바꾸는 것은 타인이 아닌 자신 그대로다.
절대로 못할 거라 마음먹은 그 순간 이거라도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 작은 선택이 조금은 나은 삶으로 가게 해주는 시작이 되어 준다.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는 실천들이 모여서 지금 닥친 힘든 순간을 바꿔나가는 에너지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믿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난 세무회계 사무실 입사 한 달부터 1년만 버티고 퇴사하리라.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1년 더 버버티기로 결심했다. (이유는 앞으로 풀어나갈 예정)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도, 책상에 앉아 일을 하면서도 문득문득 아... 퇴사하고 싶다... 를 외친다. 하지만 남편 눈치에 치여 매일 자존감 없이 살아가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곳을 그만두고 다른 곳을 간다고 한들 아직은 신입 쪼랩이며 또 다른 직무를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면 그곳에서 난 또 신입으로 입사이다. 그럴 바엔 이곳에서 버티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도 난 회사로 출근한다. 퇴사를 꿈꾸지만 진짜 속마음은 신입이 쌓여 제대로 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력자로 성장하기를 꿈꾸면서. 나의 재취업에 시작은 이렇게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상황을 바꾸는 마인드셋>
나는 할 수 없어 - 이건 내가 할 수 있어!
나는 보잘것없어 -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야!
이렇게 밖에 못살아 - 이대로는 살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