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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에녹 Jun 09. 2023

상식은 깨지라고 있는 것

“이번 여행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어?”


여행을 다녀오면 늘 받는 질문 중의 하나. 어디가 제일 좋았는지. 뭐를 먹었는지.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많이 궁금해한다. 어찌 보면 타인의 여행을 통해 대리만족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겠다. 터키를 다녀오면 열기구는 탔는지를 물어보고. 캄보디아를 다녀오면 프놈펜은 어땠는지를 물어본다. 마다가스카르를 다녀오면 꼭 듣게 단골 질문. 펭귄 봤어?


이러한 질문들에도 마치 어제 다녀온 듯 신나게 얘기할 수 있다. 다만 여행을 다녀와서 내가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여행지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여행을 가게 되면 유명 관광지를 먼저 보기보다는 사람들을 우선 관찰한다. 그들의 표정은 어떠하고 어떻게 웃고 무엇에 즐거워하는지. 그리고 그 나라의 문화 중에 내게 낯선 것은 없는지 관찰하고 또 관찰한다.

 

문화 얘기가 나왔으니 이번 일본에서 가장 낯설었던 문화가 하나 있었다. 바로 특정 시간에 전철을 탈 때는 여성 전용 칸이 있다는 것. 일본 들어온 첫날. 저녁 비행기로 일본에 입국했다. 꽤나 늦은 시간에 전철을 타고 묵기로 한 친구 집에 가야 했다. 전철에 사람은 또 어찌나 많았는지. 사람 없는 틈이 보일 때까지 앞쪽으로 걸었다. 그렇게 맨 앞 칸에 타게 됐다. 잠시 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수군수군. 주변 여성분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한국인인 거 티 나나. 해외 나가면 많은 사람이 한류 덕을 본다던데 나도 덕 좀 보나 싶었다. 그렇게 한류에 도취해 있을 때 한 여성분이 말을 건넨다.


“한국 분이신가요?”

“어?!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티가 나나요?”

“여기 여성들만 타는 칸이에요…”


아뿔싸. 여성들만 타는 칸이라니. 주위를 둘러보니 남성이라곤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여성들이 일제히 나만 바라보고 있는 거 아닌가. 그것도 서로 알 수 없는 얘기로 대화하면서. 나는 나가야 했다. 하지만 전철은 이미 여성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핸드폰도 들어 올릴 수 없는 비좁은 공간이었기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귀도 감을 수 있으면 더 좋았으련만.

 

얼른 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전철은 급행 전철이었다. 꽤나 많은 정거장을 멈추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섯 정거장을 쉬지 않고 달리셨다. 그렇게 다음 정거장이 됐고 나는 연신 스미마셍을 외치며 탈출했다. 내 인생에서 이제껏 이렇게 많은 여성에게 눈짓을 받은 적이 있었나. 달콤한 눈짓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부득이하게도 아주 따가운 눈초리였다.


친구한테 이 얘기를 꺼내자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일본은 밤늦은 시간 맨 앞칸은 여성 전용칸으로 이용된다고. 표지판 있었을 텐데 못 봤냐고. 나는 전철 내부에 내가 들어갈 빈틈만 찾다가 그 표지판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실제로 다음날 비슷한 시간대에 버젓이 표지판이 있었다.


"WOMEN ONLY"

 

여행을 다니다 보면 내가 기존에 갔고있던 상식들이 부서지고 새롭게 쌓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작은 사람이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내 경우의 여행은 기존에 내가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들이 부서지는 것들의 연속이다. 그렇게 부서진 것들이 새로운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경험. 그 경험이 쌓여서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내 삶을 살펴보게 되는 시각. 내가 여행지에서 돌아와 추억하는 것들은 대개 이런 붕괴에서부터 온다.


그래서 방법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이 될 때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된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건지. 내가 모르는 건 아닌지. 할 수 없다는 생각보다 할 수 있는 방법을 한 번 더 생각한다.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자꾸만 생각하면서 말이다.


나는 나의 이런 삶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한다. 되지 않을 것 같아도 우선 한 걸음만이라도 떼보자는 생각. 이렇게 성공하기라도 하면 인생의 또 하나의 멋있는 발판이 만들어지는 경험이겠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할지라도 또 다른 발판이 놓일 거라고 생각한다.


도전하는 것에 진심이었으니 진심이 담긴 실패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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