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udentJ Apr 11. 2021

뉴욕집을 떠나며

팬데믹은 아무도 못 말려

우리 가족에게 집 문제가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건 아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아니면 그 이전에 내가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 시작됐을 수도 있다. 나의 뉴욕 생활이 2년 정도 되었을 때, 아들은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겠다고 했다. 이로써 4인 가족인 우리 집은 서울에 2개 뉴욕에 1개의 집을 가지게 되었다. 일 년 뒤 아들은 다시 집으로 들어왔는데, 이번엔 딸이 미국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해보기로 하고 유학을 시작했다. 서울에선 집이 하나가 되었지만 뉴욕집이 둘로 늘어나 아직도 집은 3개, 그리고 아들은 일 년 뒤 자신도 대학을 졸업하면 대학원에 진학하고 독립하겠단다. 드디어 4인 가족 4가구로 접어들 시점이었다. 이건 문제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최첨단 트렌드인가 알쏭달쏭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더 큰 문제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2019년에 접어들면서 나의 미국생활은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본격적인 사업확장 아이디어가 검토되는 중이었다. 그러던 2019년 말,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뉴스에 등장했고 처음에는 태평양 넘어 미국까지 전염병이 도달할 것 같지 않았다. '미국에 있는것이 오히려 안전한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고 2020년 3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미국의 대처는 전 세계 사람을 의아하게 만들 정도로 허술했다. 나는 황급히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만약 병에 감염이라도 된다면 나는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매달 내는 렌트비와 유틸리티가 3천 불이 훨씬 넘었지만 감수하고 한국에 머물며 뉴욕의 상황을 살피다가 나는 8월이 되어서야 딸이 학교 때문에 미국으로 들어올 때 도와준다는 핑계로 같이 들어왔다.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뉴욕의 상황은 지난 4월과 5월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아직도 매우 좋지 않았다. 맨해튼의 화려한 빌딩에서 근무하던 직장인들은 모두 재택근무를 하느라 건물은 텅 비었고 굳이 맨해튼에 살 필요가 없어진 뉴요커들은 외곽으로 모두 빠져나가 도시는 텅 비어 버린 것이다. 거리는 홈리스가 넘쳐나고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음식점은 픽업은 가능했지만 비닐이나 유리로 가림막을 해놓은 모습은 서로를 피하라고 압박을 주는 것 같았다. 나의 맨해튼 집 이웃들은 참 친절하고 밝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풀이 죽은채로 웃음기 없이 눈도 마주치지 않는 모습은 예전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두려운 현실이었다. 길에서 만나는 껄렁한 청년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도 싫었다.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는 1년의 렌트를 지금 막 시작한 상황이었다. 계약서를 뒤져보니 내가 계약을 깰 경우 다 물어내는 규정이었다. 집주인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고 좋은 친구였는데 그런 사람과 실랑이를 해야 하는 것도 참 고역이었다. 하지만 방법은 없고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협상을 했다. 뉴욕의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어 렌트를 못내는 상황이었고 심지어 야반도주를 하는 사람의 이야기도 들렸다. 다양한 사람들의 각각의 조언을 모두 들으며 혼란스러웠고 이런 상황에 놓인 것이 원망스러웠지만 끝까지 내게 용기와 위안을 주는 친구들과 이웃이 있어 하나하나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드디어 나는 그 집을 떠나게 되었다. 집주인의 도움으로 새로운 세입자를 구했지만 그는 내가 내던 렌트보다 훨씬 적은 금액을 내겠다고 했고 계약을 깨는 입장인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집주인에게 그녀가 메꾸지 못하는 월세 금액을 수표로 써줄수밖에 없었다. 모두 맨하탄을 떠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새로 렌트를 얻으려는 사람을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기 때문이다. 돈도 잃고 시간도 너무 쓰고 마음도 상했다. 정들었던 집을 떠나는 일도 슬펐다. 아마 이 집은 내게 많은 위안을 줬나 보다. 이삿짐을 싸고 집을 모두 청소하고 미친 듯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당분간 딸과 같이 머물기로 하고 새로 얻은 이타카의 집으로 출발했다. 

집과 사무실의 렌트 종료, 이삿짐 업체 수배, 이삿짐 싸기 이 모든 일은 나 혼자는 정말 버거운 일이었다. 집과 사무실의 짐은 26피트 콘테이너에 실어야 가능한 분량이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다. 하지만 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힘들었지만 했다. 이사를 해놓고 나니 맨해튼을 떠날 때의 섭섭함은 온데간데없고 마음이 편안했다. 뉴욕에서의 3년 넘는 기간 동안 어떤 업적을 세웠느냐고 누가 묻는 다면 대답은 좀 궁하다. 하지만 그동안의 내 시간들의 밀도가 어땠는지 물어본다면 가식 없이 빽빽했다고 말하고 싶다. 앞으로는 일이 잘 될 것 같다.

이전 11화 College Move-In Day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