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7일의 기록
미국에 와서 모두 차를 먼저 사야 한다고 조언해 줬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운전을 즐겨하지도 않은 데다가 혼자 살면서 차가 문제를 일으킬 생각을 하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운전할 때 문제가 생길 경우나 수리를 해야 할 경우 나는 언제나 뒤로 물러서 있었고 모든 일을 남편이 처리 해왔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이 많아 살기 편한 뉴저지에 살면서 차를 사느냐, 비싼 월세를 물면서 차 없이 맨해튼에 사느냐의 선택에서 나는 맨해튼에서 사는 걸 선택하고 차가 없이 살면서 생기는 모든 불편을 감수하며 3년이나 뚜벅이 생활을 했다.
하지만 내가 꼭 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일이 생겼다. 딸이 코넬대학교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려고 학교로 들어가야 하는데 짐이 생각보다 많고 교통이 불편했다. 혼자 감당하기엔 많은 짐도 문제지만 팬데믹의 영향으로 교통편이 줄거나 확신하기 어려웠다. 딸은 짐을 모두 택배로 보내겠다고 했지만 이것도 내가 보기에 맞는 방법은 아니었다. 나는 미국에서 한 번도 차를 운전해 본 적이 없었지만 한번 해보기로 했다. 보험료 포함하니 웬만한 중고차 구입비용에 맞먹는 값을 치르고 한 달 일정으로 차를 빌렸다. 물론 이전에 신분증 명목으로 뉴욕주 운전면허증은 따 놓은 상태였다.
새벽부터 서둘러 맨해튼에서 출발하여 코넬대학이 있는 이타카로 향했다. 생각보다 긴 여정이었다. 물론 길 양 옆에서 보이는 압도적인 초록은 도시에서의 빡빡한 생활을 잊게 해 주기에 충분했지만 어설픈 운전자인 엄마를 배려하며 조잘대는 딸이 없었다면 충분히 지루했을 시간이었다. 낯선 도로 표지판과 매끄럽지 않은 도로 상황 그리고 낯선 길이 피곤함을 더해주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주유하는 방법도 몰라 인심 좋아 보이는 할머니의 도움을 받았어야 만했고 몇 갤런을 넣는 것이 적당한지를 몰라 무조건 가득 주유만 하기로 했다. 오랜 여정을 거쳐 이타카로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이곳의 시골스러움에 다시 한번 놀랐고 농장, 헛간, 말들을 보며 대학 캠퍼스에 드디어 도착했다. 캠퍼스는 광활하고 웅장하고 멋졌다. 앞으로 딸이 이곳을 누빌 생각을 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서둘러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빠르게 캠퍼스를 둘러보는 내내 벅찼던 내 가슴은 딸이 머물기로 계약한 숙소에 들어서자 좀 서늘해졌다.
그곳은 학교의 울타리 안에 위치한 방 3개 아파트였고 이미 다른 2명의 건축학과 4학년 학부생이 머물고 있었다. 딸의 하우스메이트들은 매우 착해 보였다. 하지만 공간은 생각보다 지저분했고 낡아 있었다. 방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엌, 화장실 등 공용공간이 눈에 거슬려 딸이 너무 맘이 쓰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오산이었고 딸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온 다운타운도 내가 살던 서울과 맨해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초라했고 그나마 팬데믹으로 문을 연 가게도 얼마 없었지만 이것도 딸은 호탕하게 웃으며 오케이였다. 지낼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아이를 두고 떠나는 것 같아 나는 눈물을 참으며 아이와 작별을 하고 맨해튼으로 돌아가는 도전을 시작했다. College Move In Day에는 엄마가 방도 좀 치워주고 할 줄 알았는데 나는 집이 지저분해서 치울 엄두를 낼 수 없었고 하룻밤 잘 곳도 없어서 오늘 내로 맨하탄에 돌아가려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타카로 가는 길에 믹구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는 것이 찜찜했던 나는 내내 물도 마시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았는데 돌아오는 길에 탈이 날 징조가 보였다. 잔뇨감이 남고 소변보고 나서 통증이 느껴지는데 이건 방광염의 증세인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휴게소를 네 번이나 들러야 했고 다양한 상태의 화장실을 경험하고야 말았다. 몸도 안 좋고 낯선 길을 서둘러 돌아오는 길에 내 머릿속을 여전히 복잡하게 하는 건 딸의 앞으로의 생활이었다. 이때 문득 내 머리에 떠오른 한 마디가 있었는데 그것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였다. 내 주위의 많은 분들이 내가 미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 했던 말이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라는 말을 내게 하시는 분들은 대게 무척 나를 위하는 분들이다. 나도 딸이 아까워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를 위하는 마음에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들으며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말을 딸 때문에 다시 떠올리며 과연 나는 그리고 딸아이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마음이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미국행을 택한 것은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외국에서 혼자 살기는 안락함과 편안함과는 완전 정반대에 있다. 40대 후반에 뉴욕에서 혼자 살기는 낭만적일 것 같고 한껏 멋을 부린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뭐든지 물어봐야 하고 일상생활 전부가 불편한 곳에서 사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선택이 성공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이를 이겨내는 것도 만만치 않다. 남이 시켜서 한 일이 잘 안 됐을 때는 변명이나 핑계가 있지만 내가 선택한 것은 오롯이 나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한국에 가족을 두고 온 터라 나로 인해 그들이 감당해야 할 경제적 손실, 가정에서 아내, 엄마가 없음으로 인한 불편함을 주었다는 미안함이 말하지 않아도 항상 내 안에 있었다.
게다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라는 말을 들을 때면 내게 부귀영화는 절대 안 올줄 알기 때문에 도대체 나는 왜 이 생활을 할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힘든 도전의 결과는 항상 부귀영화는 아니며 나는 처음부터 그걸 바라지도 않았다. 내가 바란 것은 도전 그 자체이며 도전의 과정에서 수반되는 나의 성장이었다. 충분한 정규 교육을 받았고 치열하게 사회 경험을 했지만 많은 부분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확인할 수 있었던 나는 나 자신의 성장을 항상 중요하게 여겨왔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나은 점이 있다면 고통스러운 과정은 항상 나에게 큰 성장을 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도전에서 오는 고통을 고통 그 자체가 아닌 성장의 시작으로 생각하는 점이다.
내가 좋아하는 넷플릭스 콘텐츠 중에 Comedians in Cars getting Coffee라는 게 있다. 인간미 있어 보이는 이 쇼의 호스트인 Jerry Seinfield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코미디언 Trever Noah와 이야기를 나누는 편에서 나는 Trever Noah가 들려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도 좋고 Jerry Seinfield가 그를 존중하며 나누는 이야기도 좋았지만 Jerry Seinfield의 이 말이 제일 인상 깊었다. ‘I always say that pain is knowledge rushing into fill a gap’ 이후에 그는 침대 모서리에 발을 찧으면서 느끼는 아픔은 내가 뭘 모르기 때문이고 고통은 정말로 빠르게 정보를 준다 라고 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뭔가 고통이 시작될 때가 내가 성장할 수 있다는 사인이며 이런 생각은 고통을 고통 그 자체나 아니면 더 나아가 두려움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그렇다면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포기하고 가만히 있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 또한 온전히 편할리가 없다. 자신이 변화를 두려워하느라 머뭇머뭇했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인데 이런 비겁함을 어떻게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의 핑계와 주저함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나는 나의 자존감이 멀쩡할 수 있을까 의심해 본다. 나는 나의 자존감이 상처 받지 않게 하기 위해 부귀영화니 뭐니 하는 말은 잊고 내 맘이 끌리는 쪽으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딸에게도 나중에 전화로 말했다. 지금 너의 도전은 이후에 어떤 성공을 보장하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라고. 목표는 있겠지만 목표는 과정이 모여 이루어 내는 것일 뿐이고 어떻게 하든 하루하루 쌓아가는 과정이 튼실하다면 처음 세운 목표와 다른 성과를 이루어 내더라도 그것이 더 멋질 수 있다고 말이다. 내가 뭐가 되겠다고 시작하는 것은 그것 하나면 포기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과정에서 나의 성장 또한 나의 목표라면 쉽게 포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딸에게 다시 한번 힘주어 말한다. ‘대단한 걸 이루려고 고생을 시작한 것이 아니고 도전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이므로 하는 것이다. 뭘 아무것도 안 하고 피하려고만 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사전에 아예 없는 것으로 치자. 적어도 너랑 나는’ 딸아이도 기꺼이 동의한다. 뜻을 같이 하는 동료가 생겼다.
나는 미국에 와서 진정한 어른이 된 것 같다. 집을 계약하고 먹고 살길을 치열하게 궁리하고 집을 관리하고 등등. 나는 혼자 살아본 적이 없는 채로 결혼을 했다. 부모님 보호 아래 있다가 남편과 모든 일들을 협조해서 일을 처리해 왔던 것이다. 나이는 점점 들었고 엄마가 되고 회사를 운영하면서 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중요한 일들을 처리해왔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미국에서 혼자 살면서 나 혼자 처리해야 하는 수많은 일들이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른다. 식료품을 사서 무겁게 들고 오면서 먹고사는 문제가 이렇게 인생에 많은 부분이었나? 의심이 들었고 한밤중에 건전지 교체가 필요해 빽빽 울어대는 스모크 알람을 처리하지 못할 때는 지옥 같았다. 이유도 정확히 몰랐지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천정에 붙어 있는 스모크 알람에 손이 닿지 않았다. 그날 밤은 꼬박 뜬 눈으로 새웠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저런 불편함을 겪으며 나는 누가 나 대신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아도 혼자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고 이제는 미국이 아니라 다른 곳에 살아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아직 미국에서 완전한 경제적 독립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얼마 안 있어 달성할 과제로 남겨두고 싶다.
딸이 머물 집에서 아이가 과연 뭘 먹고 지낼 수 있을지가 여전히 걱정되었다. 팬데믹의 영향과 작은 캠퍼스 도시라는 이유로 외식도 만만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교의 서비스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심란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의 경우는 아니지만 내 친구들 중에는 결혼 후 오랜 기간 친정에서 반찬을 바리바리 싸와서 연명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내가 그 친구들의 어머니의 마음이 되어 나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아이를 어디 낯선 곳에 떨어 뜨려 놓은 것 같은 마음이 진정이 안됐다. 나도 내가 이런 마음 일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불안을 잠재워 준건 딸아이였다. 살 수 없을 것 같은 셰어하우스의 운영 방법은 한밤중의 웰컴파티에서 대부분 정해졌으며 더러운 화장실은 대충 치웠단다. 여기저기 동네 일주를 하며 이타카에서 제일 살만한 동네가 어디인지 나에게 알려주었고 원래는 요가를 즐겨하던 아이였지만 집에 같이 사는 학생들의 취미인 러닝을 같이 하기로 했단다. 한 번만 해보면 되는 거였다. 어른으로 살기는. 나는 그게 40대 후반까지 안되었던 거고.
딸아이 집에 같이 사는 학생은 터키 출신 여학생과 중국 출신 남학생이다. 나는 남학생이 한집에 있는 것도 별로였는데 직접 만나보니 세상 착한 친구이고 약간 너드스러웠다. 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음식 솜씨가 좋아서 삼시 세끼를 음식을 만들어 한 상을 차려 놓고 진수성찬을 먹는다고 한다. 단점은 음식을 딱 일 인분만 하는 거라고 해서 웃었다. 터키 출신 여학생은 너무 착한 사람이란다. 처음 집에 갔을 때 남자 친구를 소개해 줬는데 한국인이었다.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자란 한국 청년은 식구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다고 했다. 이들 모두 내가 미국에 오지 않았으면, 딸이 미국 대학에 오지 않았으면 만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이다. 때때로 나는 내가 아는 것 경험했던 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놀랍다. 그러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고 혼자 생각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첫아이를 가졌을 때 시어머니는 내가 동네 산부인과를 다니지 않고 차병원을 다니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남편이 검진 날 따라가 주려고 시간을 맞추는 걸 납득하지 않으셨다. 나는 은근히 너무 섭섭했고 결국 시어머니는 시누이의 임신 과정을 지켜보시고 난 후 나를 이해하셨다. 어머니는 요란스러운 출산준비를 해보지 못한 세대셨다. 나는 출산 후 몸조리를 집에서 했다. 그때만 해도 산후조리원이 오히려 아이에게 안 좋을까 봐 불안했었다. 요즘 후배들은 산후조리원이 필수이고 어느 정도 레벨의 산후조리원 인지도 중요한 것 같았다. 비용이 많이 드는 산후조리원 때문에 시댁과 갈등도 있어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산후조리원이 꼭 필요한가? 물었다가 내가 시어머니에게 섭섭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절대로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 해도 다른 이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리라 다짐한 적이 있고 나의 판단을 내 경험 안에 가두지 않으려 노력한다.
말랑말랑한 세계관을 가지며 다른 사람을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다. 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 딸은 노력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고가 유연한 나이에 여러 경험을 하는 것이 이래서 좋다. 세상에 다른 입장을 가지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무진장 많으며 그들 각자가 모두 성실히 쌓아온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자연스러운 존중을 가지라고 딸에게 말해준다. 그 아이는 이미 알고 있는데 말해준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딸을 차로 4시간 걸려 학교에 데려다주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3년 전 처음 미국에 와서 시작한 나의 타향살이 설움이 딸에게 반복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마 이건 나의 착각임에 틀림없다. 아이는 과정을 충실하며 목표를 위해 나아갈 거고, 어른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이해하고 어우러져 사는 지혜를 학교에서 배울 거다. 걱정은 필요 없고 격려도 더 이상 필요 없다. 우리 따로 살다가 가끔 만나 그동안 느꼈던 걸 같이 나누고 공감하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