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정말 오랜만에 사촌 형제들을 만난 자리에서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회사는 직원들이 거의 다 여자야."라고 말했더니 이를 듣던 사촌 오빠가 "여자 많은 회사는 힘들지 않아? 여자의 적은 여자라던데?"라고 하더군요.
여초 회사 또는 남초 회사에 대해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가요? 오늘은 극단적인 남초 회사로 입사해 현재의 극단적인 여초 회사에 다니고 있는 저의 경험을 여성의 시각에서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제 첫 직장인 stx팬오션은 예상하시겠지만 남초 회사였습니다. 그나마 저희가 입사할 때 동기 중 여성 비율이 20% 정도로 획기적으로 증가해서 여성들이 드문드문 회사에 보이기 시작했을정도였죠.
저는 회사 창립 이래 최초로 기획실에 입성한 대졸 여성 직원이었습니다. 그나마도 진취적인 팀장님 덕분에 기획실로 발령을 받은 것이지 당시 본부장님께서는 '여자가 왜 기획실에 들어오나?'라고 말씀하셨다는 후일담을 들었습니다. 15년이 흐른 지금은 그러한 편견이 사라졌기를 바라봅니다.
어찌 됐든 입사 후 여성이라고 차별을 받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여자가 귀하니 대접받는 경험이 더 많았습니다. 팀장님은 출장 갈 때 제가 짐을 들고 있으면 가져가 들어주신다든지, 회식이 2차 3차로 길어지면 저한테만 먼저 들어가라고 하셨죠. (누군가는 저를 위한 배려가 아니고 남자들끼리 놀고 싶어 먼저 보낸 거라고 하던데 저는 저를 위한 배려였다고 믿겠습니다.) 저는 '더 놀고 싶은데 왜 가라고 하지?'라며 아쉬운 발걸음을 집으로 돌리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회식 장소 선정권도 저에게 부여하셔서 (여자라기보다는 막내여서) 기존 삼겹살 회식이 아니라 정동에 있는 분위기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회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만의 리그에 융화되기 위해서 나는
남자 많은 회사에서 여자로서 약간 불편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남자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그중에는 매우 고급 정보에 속하는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를 한다는 점이었죠. 저는 항상은 아니었지만 종종 남자 선배들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면 저도 갈래요 하며 가끔 따라나가서 '그들만의 리그'에 끼고는 했습니다. 비흡연자로서담배 냄새를 참아내면서도그때에는 남자 많은 회사에서 여자도 남자가 하는 것들을 다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오기가 발동했던 것 같습니다.
오기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여담 하나 소개하 드릴까 해요. 중국 조선소에 선박 매입 계약을 하러 갔을 때의일입니다. 조선소의 CEO 가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에 여러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워낙 모험심이 강한 저는 음식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도를 즐기는 편인데 테이블에 뱅어포 무침 같은 요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맛있어 보여서 한 입을 무는 순간 같은 테이블에 있던 통역사님께서 '어, 저거... 뱀인 거 같은데?'라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고민했습니다. '삼킬까? 먹을까?' 모험심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뱀은 거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자의 '깡'(?) 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뱅어포다 생각하고 뱀 반찬을 먹었습니다. 심지어는 '맛이 괜찮은데요?'라고 너스레를 떨며 한 개를 더 집어먹었죠.
다음날은 조선소 현장 답사를 나갔다가 조선소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리얼 로컬식 반찬에 저희는 손님이라고 특별 음식이 하나 추가되었는데 바로 난생처음 마주하게 된 개구리탕이었습니다.전 날은 그나마 약과였던 게 뱀 반찬이 3 ×4cm의 증명사진 사이즈로 잘려있어 형체 파악이 안 되었었다는 점이죠. 그런데 이 날은 개구리들이 그대로 형체가 보존된 채로 탕 안에 떠 있었습니다. 음... 어제보다 몇 초 더 고민했고 저의 결정은 개구리탕 도전으로 기울었습니다. (글을 쓰기 전만 해도 머릿속에 국물과 함께 개구리도 먹었다고 기억이 저장되어 있었는데 글을 쓰다 보니 도대체 어떻게 그랬을까 싶어 개구리를 건져 먹었는지 국물만 먹었는지 헷갈리네요.) 손님이라고 줬는데 안 먹으면 실례다 싶었죠.
나는 과연 먹었을까 안 먹었을까?
출장 후 회사로 돌아와서 팀장님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저의 무용담을 자랑하듯 이야기하고 다니셨습니다. (일로 칭찬받아야 하는데 먹는 걸로 칭찬받다니...) 저도 내심 뿌듯했습니다. '여자라고 못 할 건 아무것도 없어'라는 생각과 함께요.
이렇게 남초 회사였던 첫 직장에 저는 전형적인 여성상이 아닌 대학 때 별명이었던 철녀(Iron Girl) 스타일의 새로운 여성상 (좋게 말하면 '알파걸')을 각인시키는 소소한 도전을 즐기곤 했습니다.
여성, 특히 워킹맘에게 남초 회사란?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남성들의 세계에 융화되기를 꺼리지 않는 저 같은 여자에게도 남초회사는 우호적인 직장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전 직원이 500명 정도였던 회사에 단 한 분의 여성 팀장님이 계셨던 게 단편적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저 때부터 여성 채용 비중이 높아졌으니지금은 여성팀장이 늘어났을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위로 더 올라갈수록 남성과 동등한 실력만을 갖췄다고 승진하기에는 굉장히 큰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을 겁니다. 이는 안타깝게도 PwC 컨설팅에서도 그대로 마주했던 현실이기도하고요.
여성 승진의 현실이 더 궁금해져서 대기업 화학회사에 다니는 남편 회사에 대해서도 물어봤는데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었습니다. 남편의 회사 본사에는 약 1,100 명의 직원이 근무 중인데 여자 팀장이 단 한 명도 없다는군요. (범위를 본사가 아닌 직장 전체로 넓혀도 4,000명 이상의 직원 중 여자 팀장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합니다.) 본사에 30여 명의 임원 중 여성 임원이 한 명 있지만 회장님과 친인척 관계라는 특수성이 있다고 하네요.
보통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제기되는 반문이 있습니다.
"승진을 시키려 해도 스스로 그만두는 데 어떻게 승진을 시킵니까?"
그래서 남편에게 또 물어봤습니다.
"팀장으로 승진할 여자 대상자가 없었던 거야 아니면 있었는데 승진이 안 된 거야?"
"보통 결혼한 분들은 과장에서 많이 그만두더라고. 내가 알기로는 연구소에 여성 차장님 한 분 계신데 결혼 안 한 분이야. 본사에 결혼 한 여성 차장님 한 분 계셨었는데 스스로 그만두셨어. 다른 대기업 고객사에 가봐도 여성 팀장은 본 적이 없어. 디자인 쪽이면 모를까."
여기까지 들으니 위의 반문이 사실인 듯합니다.
그들은 왜 회사를 그만뒀을까요?
예상하시겠지만 근본적 원인은 육아입니다. 그리고 워킹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조직 문화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느라, 아이가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가느라 등의 회사에 늦거나 갑자기 연차를 써야 하는 돌발상황들이 발생합니다. 워킹맘이 되어보지 않은 남성들이 워킹맘의 이러한 현실을 100%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할 테죠. 제가 만약 제 첫 직장이나 남편 회사 같은 남초 회사의 남자 팀장님 밑에서 일하는 과장이었다면 아이 때문에 지각하거나 급한 연차를 쓸 때마다 눈치 봐야 하는 것도 괴롭고 팀원들한테도 미안해서 퇴사 또는 이직을 고민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워킹맘의 삶이란...사진:Jordan Whitt
예전에 stx팬오션의 여자 동기 중 외국계 럭셔리 회사로 이직을 한 친구가 있었는데 저는 그녀에게 서론에서 제 사촌오빠가 했던 질문과 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생각보다 그런 건 별로 없어. 오히려 다들 워킹맘이니까 아침에 좀 늦어도 이해하는 분위기야. 남은 일이 있으면 일찍 퇴근해서 집에 가서 할 수도 있고."
지금 제가 딱 이러한 워킹맘을 위한 배려가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직원의 반 이상은 워킹맘이기 때문에 저나 다른 워킹맘들은 아이 일로 아침에 좀 늦어도, 갑자기 연차를 써야 할 때도, 조금 일찍 나가야 할 때도 회사의 배려 덕분에 미안한 감정과 눈치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여자이니 승진 차별이 있으래야 있을 수가 없죠.
우리나라보다는 높은 비율의 여성들이 일하고 있는 영국의 워킹맘에게 어떻게 육아와 일을 병행하고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그녀는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준 후에 출근하고 아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퇴근할 수 있는 유연 시간 근무가 영국에서는 보편적이라고 하더군요. 10시에 출근해서 3~4시쯤 퇴근할 수 있는 근무 제도가 우리나라에도 보편화되어 있다면 훨씬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았으리라 생각이 되네요. 우리나라도 공무원 조직에 여성 대상 파트타임 근무 제도가 몇 년 전 도입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민간 회사에서는 아직은 꿈같은 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자의 적은 여자다'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의견을 이야기하며 오늘의 글을 마칠까 합니다.
저도 PwC 컨설팅으로 옮긴 후 첫 프로젝트에서 인생 처음으로 여자 상사를 만나 호되게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저의 현 직장의 한 연구원도 이전 직장에서 여자 상사가 너무 힘들게 해서 그만뒀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여자 상사의 감정적 괴롭힘, 시기와 질투(?), 성과 가로채기 등의 드라마에 흔히 나올 법한 일들을 호소하는 여자 후배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제 경험과 주변의 많은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적이 되는 여자 상사' 중에는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가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객관적 통계가 아닌 제 경험치로 말씀드리는 것이니 '모든 결혼 하지 않은 여자 상사=적'이라고 여기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여성보다는 일이 그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에 지나치게 열심히 일 하는 경우 아랫사람을 힘들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은 육아를 하면서 참을 '인'자를 수없이 새기며 인생의 도를 닦습니다. 특히 남자아이를 키우는 저 같은 사람은 나와는 너무 다른 화성에서 온 9살 그 남자를 (그 남자에 45살 제 남편도 포함시켜야겠습니다.)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합니다. 상담도 받아보고, 그의 입장에서 생각도 해보고, 책도 읽고, 마음 터 놓고 대화하는 등의 노력들 말이죠. 이러한 과정에서 남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포용력이 자라나지요. 그리고 본인보다는 가족을 먼저 위하는 약간의 희생정신 (저의 경우는 약간의 희생정신이지만 어떤 분들에게는 대단한 희생 정신일 수도 있겠습니다.)도 생겨납니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경우 이러한 과정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심이 적을 확률이 높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여자가 많은 회사라고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논리가 성립되지는 않습니다. 저희처럼 모든 여자 팀장 및 실장이 워킹맘인 회사에 '여자의 적'으로 불릴만한 분은 없다고 보입니다. (물론 팀원들의 생각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네요.)
이제 정말 결론을 내릴 때인 것 같네요. 여자가 많은 회사는 1) 여자가 일하기 좋은 근무 환경을 제공하며, 2) 여성이 남성보다 잘할 수 있는 분야의 산업 또는 직무를 다루는 회사입니다. 2) 에 해당하는 회사는 필연적으로 1)의 특성을 갖게됩니다. 단, 여자가 많은 회사에서는 '여자의 적'인 또다른 여자를 만날 확률도 높아질테니 이런 확률이 여성 후배님들께 나타나지 않도록 기원합니다.
여성의, 그리고 워킹맘의 커리어 패스가 궁금하신 분들은 미국의 전 영부인 미셸 오바마가 쓴 비커밍 (웅진 지식하우스, 2018)이라는 책을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