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도덕 감정 생태계 진단
개인이든 국가든 그 구성에서 기업의 비중은 역사적으로 피크 지점이다. 때문에 기업과 도덕감정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현실에 대한 가장 유용한 일이 될 것이다. 이해관계를 위해 계약의 형태로 형성된 탐험선 단과 그것을 펀딩을 자본가들 그 모임을 비교적 근대적인 최초의 회사로 본다면, 기업은 교회나 가족 같은 조직에 비하면 굉장히 역사가 짧다고 볼 수 있다. 관계 규정에서 계약이 핵심이 되는 기업은 도덕과 먼 것 같지만 이들도 도덕 감정을 활용한다. 규칙을 넘어선 도덕적인 선이 존재하고 잘 조율된 룰들은 직원들이 계약에 명기된 조건 이상으로 일하게끔 동기를 부여한다. 이런 현상은 계약이 등장하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계약하면 떠오르는 봉건 기사들은 영주와 계약을 했고 전쟁이 나면 싸우면 그때 싸우면 그만 이었지만 그들은 평시에 기사도란 이름으로 여러 가지 제약을 받고 헌신을 강요받았다. 명시적인 계약이 존재하면 그 이상의 범위를 통제하는 규칙이 도덕감정의 원칙으로 생성된다. 일단 이걸 이해하고 넘어가자.
현대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CEO가 똑바로 하지 않으면 이사회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그런 조치가 이뤄지기 전 노동자들은 지켜야 하는 선을 지키지 않는 CEO에 분개한다. 때문에 좋은 CEO는 사내 규정을 잘 지키려 노력한다. 그리고 나아가 더 계약 이상의 것을 하려고 한다. 때문에 좋은 CEO는 가장 먼저 출근하면서 출근이 아니라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모범이 되고 그들이 노동자들보다 더 헌신하고 있음을 증명하려고 하며, 그렇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연출이라도 한다. 때때로 CEO가 계약서에 없는 호의를 베풀며 가족처럼 그들을 대할 때 기업은 계약을 넘은 어떤 공동체로 변모한다. 기사도에 지배받는 기사들처럼 그 기업의 문화(도덕 감정)에 의한 경영이 시작되는 것이다. 최근에 최저임금 혹은 1달러를 받으면서 일하는 CEO는 흔하다. 이런 행동들은 기업을 계약적 구속 관계를 넘은 그 무엇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다. 그런 헌신적인 CEO를 볼 때 직원들은 그 메시지를 즉각적으로 느끼고 그들과 닮으려고 애쓰며 그들이 받은 비금전적 은혜를 보은 하고픈 감정을 느낀다. CEO와 닮기보다 철저히 계약적 거리를 지키고 싶은 직원의 입장에선 그런 움직임은 부담스러운 것이며 그가 거리를 두려 한다면 CEO도 그 거리를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상급자와 거리를 두는 직원을 좋아하는 상급자는 없다.
이것이 직원을 가족처럼 대하고 프로페셔널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이끌어 내는 이런 방법이다. 그리고 계약의 나라 미국이라고 이런 방법을 쓰지 않는 건 아니다. 다르지 않다. 미국의 고연봉 오피스 근무자 즉 CEO들이 120시간까지 일해도 되는 자유가 보장되고 또한 그것을 선호한다는 건 그들에게 일이 도덕감정의 영역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하는 시간만이 이들이 도덕 감정을 발휘하는 영역이 아니다. 이사로서 해야 할 일 중 하나인 해고에 대해 인간적으로 하고 싶지 않다고 어쩔 수 없다는 각주를 달며 그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방어하지 않는 CEO는 없다. 그런 방어적 태도는 그들은 계약서에 따라 얼마든지 자를 수 있는 관계임에도 해고의 순간에는 사실 이들과의 도덕적 관계였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의 리더들은 자신의 피고용인들과 피자를 나눠먹을 이유가 없다. 음식을 나눠먹는 건 공동체 단위의 성립을 뜻한다. 피자로 CEO와 피고용인의 거리는 계약서보다 훨씬 가까워지는 것이다. 만약 세련되지 못한 봉건적 억압적 리더십만 아는 CEO라면 음식을 함께 나눠먹는 자리를 수치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잡것들과 공동체를 이뤘다고 골프 치는 자리에서 자랑할 수는 없다. 폭군이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인간다운 면을 노출하면 안 된다. 하지만 현대의 CEO는 노동자의 헌신을 이끌어 내야 하고 폭군처럼 굴기보단 그들의 모범이 되고자 한다. 자신의 비전을 설득하고자 한다.
소프트웨어계에서는 '장인정신'이라는 말이 있다. 그들은 월급쟁이들의 보신주의와 관료화를 경계하고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끝없이 배우고 고객에게 가치를 전달하는 것에 사명감을 느끼는 것을 권장한다. 이들은 계약으로 정의된 출근과 상명하복을 넘어 더 넓은 의미의 일의 카테고리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노력은 더 높은 생산성을 보증한다. 이것이 기업이 계약을 넘어선 카테고리가 만들어졌을 때 이루어지는 일들이고 기업들이 그것을 바라는 이유이다. 장인정신에는 정직함이 필요하고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해야 하는 도덕적 행동이 포함된다. 지난 이론 편에서 설명했듯이 도덕은 더 강한 조직을 위해 더 많은 자원에 대한 접근을 위해 재조직된다. 장인정신은 도덕 감정의 구현체(implementation)다.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일을 하는 미국 테크 리버럴 주류층들의 사전엔 대부분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들의 제품을 열심히 파는 게 이 세상을 돕는 일이다.' 냉정하게 보면 이것은 사기다. 이것은 전적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CEO의 욕망과 주주들의 배당에 대한 욕망과 자산평가가치의 증가에 대한 갈망이 Key point가 되어 이뤄지는 기업활동을 공동체에 공헌, 즉 도덕적 문제로 치환한 것이다. 이것이 기업이 도덕 감정을 활용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스스로 믿을 수 있을 때 노동자는 더 자발적으로 일할 수 있고 CEO는 양심의 가책 없이 반사회적인 지시를 내릴 수 있다.
자신에게 다른 이들보다 더 큰 대의명분이 있다고 믿는 것은 동기를 구성할 때 매우 중요하다. 이런 동기를 사용하지 않는, 사회적 맥락이 거세된 계약의 위력은 헌신을 이끌어 낼 수 없다. 그리고 사회가 없으면 도덕도 없다. 도덕 없이는 동기도 없고 말이다. 때문에 회사는 그 방법이 피자든, 구호든 여러 가지 사회적 맥락을 추가해 직원들의 도덕적인 동기를 이끌어 낸다.
회사가 도덕 감정을 투사하는 공간이 된 것은 유감스럽다. 도덕 감정이 회사의 주인공이 될 때는 상황이 좋을 때만 그렇기 때문이다. 최고 의사결정자들은 회사를 소유하고자 할 때 도덕 감정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오로지 이익뿐이다. 때문에 회사의 소유주들은 때가 되면 도덕 감정을 존중하지 않고 해고하고 조직을 떼어내 판다. 이것이 실제로 관계를 지배하는 Key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뜻을 관철할 때 벌어지는 냉혹한 현실이다. 피자도 프로페셔널리즘도 이사회의 결정 앞에선 뒷방이다.
생존하는 공동체의 윤활유로서 발명된 게 도덕 감정인데, 기업의 소유주인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핵심적 욕망을 숨기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활용하는 것은 씁쓸한 현실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원래 그렇게 유연하게 윤활유로서 활용되라고 만들어진 것이니 어떻게 보면 잘 활용하고 있는 셈이니 화낼 일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우려해야 할 일은 기업 밖의 일이다. 기업들은 직원들의 생산성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도덕 감정을 굉장히 신경 써서 관리하지만, 밖의 조직들이 더 큰 문제다.
기업 이외에 중요한 커뮤니티 유닛을 생각해보자. 가정, 지역사회, 국가 등이 떠오르는데 최근 이들에게선 질서의 Organizer의 책임감 있는 실행을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장시간 동안 모든 활동의 초점이 기업에 맞춰 조정되면서 다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지역사회는 도시화의 흐름 속에서 완전히 절멸했다. 도시화는 분열의 역사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노동공급을 위해 농촌사회는 와해되었고 사람들은 도시로 떠났다. 도시에서도 가족은 효과적으로 인력을 배분하기 위해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핵가족에서 1인 가정으로 쪼개졌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회사 근처로 이사 간다. 회사에 일하기 위해 결혼도 하지 않는다. 도시의 지역사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난 내가 사는 동의 통장이 누군지 모르는데 공무원을 조정해 자신의 이익 파이프라인으로 만들거나 아파트 값을 방어하기 위해 가격담합을 하려다가 실패해서 화가 많이 난 통장의 이야기는 요즘 자주 들었다.
둘째, 국가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그 누구도 현재 정치인들이 외세의 침략에 대응해 국민들의 주권을 찾기 위해 중국에 임시정부를 세웠던 그 정신을 잇는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주권자들은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대통령을 끌어내리긴 하지만 그것을 이을 대안세력엔 만족하지 못한다. 그냥 정권을 이리로 바꿨다가 저리로 바꿀 뿐이다. 이민이 활성화되면서 주권은 가진 인간은 국가를 선택하는 게 당연해졌다. 후발국가의 인재들이 선진국으로 유출되는 것은 이제 배신 취급도 당하지 않는다. 국가에 대한 보복심으로 인해 오히려 추앙받는다. 개인의 운명과 국가의 운명은 분리된 것이다.
셋째, 가정은 어떤가? 농경 시작 이후 폭발적으로 커지는 국가의 힘에 대응하는 마지막 보루로서 가부장이 존재했다. 이들은 병역과 세금, 부역을 도맡았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가정의 질서를 결정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국가의 지도자가 왕이듯 가정의 지도자가 아버지였을 뿐이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전면전의 빈도는 현저히 낮아졌고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기업이 여성을 노동력으로 편입하자. 가부장은 자신이 가진 질서를 결정 권력의 정당성을 잃었다. 그렇게 새로운 질서에 도달하지 못한 채 혼란한 상태가 이어지고 1인당 소득이 정체되고 가정의 필수재(부동산)의 가격이 오르자) 남녀 모두 가정의 구성을 기피하게 되었다.
인간이 가장 강한 동기를 가지는 건 도덕 감정이 동원될 때다. 그리고 도덕 감정이 작동할 수 있는 질서(테두리)를 설정하는 공동체가 마비 또는 해체된 상태라고 나는 진단하는데 이 공백에 파고든 건 다양하다. 최소 8시간을 함께 보내는 공간의 정체성 즉 커리어의 꿈을 제시하는 비즈니스계, 도덕적인 배우자에 대한 탐색은 포기하고 경제적인 결합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결혼회사, 모든 사회적 동기를 포기하고 부모에 기생하는 히키코모리, 컴퓨터 메모리 위에서 성립했지만 그것을 구분할 수 없는 뇌의 약점을 활용한 온라인 게임에 빠진 게이머, 스트리머의 탄생과 스트리머를 둘러싼 시청자들의 부족문화. 한심한 것들들이 대부분이지만 그중에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게 있다면 로컬을 강조하며 공동체의 부활을 꿈꾸는 당근 마켓을 나는 주목하고 있다. 한편에선 과거 질서로 돌아가려고 하는 반동주의적 접근들도 존재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모두 가릴 것 없이 근본주의적으로 세속을 단죄하는 모델을 답으로 제시하면서 여기저기서 기존 질서를 흔들고 있다. 남녀 연애 시장에도 반동주의는 존재 핸다. 분명히 세상은 변했지만 매노 스피어 같은 곳에선 악조건 속에서도 가부장적 프레임을 유지할 수 있는 강력한 남자가 되는 게 가정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며 그러지 못할 거면 결혼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본다.
공동체의 해체는 곧 도덕감정의 진공을 뜻한다. 한국사회는 무장할 권리를 경찰에 위임했는데 이 과정 속에서 권리 또한 해체된 덕에 우리는 범죄에 위협당하는 동료 시민을 보고도 나서지 않는다. 그건 경찰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동료 시민의 이름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도덕적 책임도 느끼지 않는다. 나의 무책임한 방관을 기억하고 고발할 수 있는 주변 시선도 두렵지 않다. 그들도 나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도덕적 장치가 동작하지 않는다면 마지막으로 고려해볼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의 관점도 동작하지 않는다. 나선다 해도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보상이 없는 게 현실이다.
도덕 감정은 자원에 접근하기 위해 작동한다고 이론 편에서 설명했다. 공동체에선 명예가 없으면 추방을 당한다. 그리고 공동체에서 배제되면 죽음이었다. 따라서 고대사회에선 사회 구성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도덕 감정에 충실해야 했다. 하나 익명 사회에선 명예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리스크 테이킹에 대한 보상은 경찰이 주는 표창장인데 표창장을 이마에 걸어놓을 것도 아니고 걸어놓는다 해도 그걸 읽어줄 사람은 없다. 이때 우리는 범죄에 휘말린 이를 돕고 싶다는 선천적으로 착한 본성과 보상 없는 위험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판단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렇게 갈등하고 방관하는 인간들에겐 무기력감만 남을 뿐이다.
기성질서에 파고들 때 교회는 믿음 하나로 똘똘 뭉친 가장 견고한 커뮤니티 중 하나였다. 이들은 고문 같은 것도 버텨낼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로마와 근대 일본 사회에 침투해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세를 확장시켰다. 하지만 도시화 이후 자본주의와 조화를 이룬 교회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복을 비는 실용적 기복 커뮤니티가 됐었다. 집사가 되는데 얼마 장로가 되는데 얼마. 정해진 액수를 맞춰 돈을 바치는 게 교회 내 직분을 얻는데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비공식적인 영역에선 더 심한 일도 벌어진다. 교인들은 자신이 출세했을 때 교회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급을 바꾸기 교회를 바꾼다. 교회 부설 유치원에선 교회를 다니면서 십일조로 임금을 페이백할 직원을 찾는다. 부모에서 자녀대로 세습되는 교회는 개인의 권력을 영속화되는 도구가 되었다. 교회 내에서 돈을 둘러싼 파벌이 생기고 이 총성 없는 복마전에서의 리더십을 의심받을까 목사는 가장 많은 십일조를 내야 하는 요구에 놓이게 된다.
세상에서 차별 없는 커뮤니티의 마지막 보루가 돼야 할 교회가 돈의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로 재구조화된 것이다.
'누가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헌금을 비교해봐라' 조용기 목사의 명언은 이런 질서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 가장 그러지 말아야 할 교회에서 그 마음을 돈으로 평가하는 것이 디폴트가 된 것이다. 마땅히 경제적 논리와 결연함을 보여야 했을 교회가 그렇다면 그럴 당위도 없는 일반시민사회는 더 심각한 한 지경일 것이다. 이렇게 교회가 타락했을 때 그에 따라 도덕적 커뮤니티를 찾는 이들의 선택지는 근본주의적 교회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기성교회를 비판하며 오직 성경의 문자만을 믿음의 근거로 삼는다. 다극화된 사회로부터 탈피해 다시 질서를 찾으려는 시도이지만 세속과 척을 지고 문자에 기반한 타율적 도덕 감정은 엽기적인 사건을 낳을 뿐이다. 그런 억압적 질서를 주도하는 사람(교주)이 도덕적일 확률도 없고 말이다. 결국 누란지위다. 교회가 해체되고 그 대신 주식회사 교회가 들어서고 그래도 목마른 사람들은 대안교회를 만들거나 극단주의에 빠진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전쟁은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사투였다. 전쟁에서 도망칠 수단은 적었고 토지와 건물을 소유한 귀족들과 귀족들의 배급으로 살아가는 로마 시민들은 서구에서 가장 성공적인 전투 집단으로서 유럽을 오랫동안 지배했다. 전쟁에서 지는 날엔 노예의 삶밖에 남지 않았다. 이들에게 전쟁은 죽고 사는 문제이며 삶 그 자체였다.
이것이 이어져 지금도 유지되는 현대 징병제는 개인의 자유를 박탈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래서 모두 공평하게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이 땅을 지켜야 한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공동책임을 이행하여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를 뒷받침할 수 있는 윤리적 근거가 수집되고 국가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했다. 개인은 국가가 마음에 안 들 때 국가를 버리고 얼마든지 재산을 보존할 화폐나 귀금속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갈 수 있고 이민을 받는 국가는 영향력 있는 이들의 이민은 환영한다. 개인과 국가의 결속이 해제된 것이다. 이제 개인은 자신이 원하는 나라를 선택해서 살 수 있고 국가는 경쟁적으로 이민을 받기 시작했다. 포로에 대한 인도적 대우를 보증하는 국제법은 사기 낮은 군인들이 언제든 투항할 수 있도록 한다.
최근 러시아의 동원명령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언론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탈영병이 될 각오를 하고 국경선을 넘고 있다. 개인이 국가를 선택할 수 있고 국가와 운명이 분리되었으며 분리된 운명을 실행할 능력(자가용을 가지고 이동 또는 저렴해진 항공 티켓) 또한 충분한 시대의 풍경이다. 러시아의 사람들이 러시아 땅에 포기하고 싶지 않은 생산수단이나 집이라도 있었다면 중대범죄를 각오하면서까지 탈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평등이 심각한 나라 중 하나인 러시아의 빈민들에게 그런 자산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주체적 판단을 할 수 있는 현대적 시민들에게 국가 이데올로기를 주도하는 엘리트들의 판단을 위해 싸우라는 명령은 어떤 도덕감 정도 동원하지 못했고 결국은 대규모 탈영 현상이 생긴 것이다.
자주 거열식을 하며 대중에게 PR을 하는 군대는 단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주적은 간부'라는 농담은 이런 맥락에서 뼈가 있다. 만약 군인들이 진정으로 결속되어있고 그들이 단일된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면 이런 농담은 병사끼리라도 용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간부가 자신의 유일한 관심사인 일상의 사사건건 방해만 하는 장애물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농담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결의도 없고 도덕적 당위도 확보하지 못한 군대는 죽음의 위험을 감당할 순간이 올 때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수천년의 전쟁사가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전쟁은 늙은 사람들이 결정하고 청년들이 수행한다. 늙은 사람들이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다하지 않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신세대를 착취한다는 인식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주적은 간부'라는 농담의 뼈는 튼튼해질 것이다. 나는 당장의 한반도 전쟁을 걱정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떠나고 싶은 나라', '지키고 싶지 않은 나라'가 되어가는 주소다. '너무나 지키고 싶은 나라'에서 살고 싶은 건 모두의 소망일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 이민을 가는 거고 말이다. 자유주의의 이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나라니까 이상을 현실로 실행할 가장 강한 힘까지도 가진 나라니까.
비즈니스 조직은 도덕 감정을 잘 활용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된다. 그런 압력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삼성전자든 깃허브든 각종 사기업이 공무원들보다 훨씬 더 높은 서비스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생산해내며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베스트 프랙티스를 공유하며 자신들의 문화를 자랑하며 그것에 이끌린 프로페셔널들을 흡수한다.
하나 그러지 못한 조직들을 보라. 대표적으로 최근 경쟁률이 떨어진 공무원 사회는 세련되지 못한 문화와 의미를 잃은 존재 의미로 인해 젊은 사람들을 대한민국의 비전에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반대로 군부시절부터 이어온 구시대적 관료문화를 들이밀고 적응하지 못한 사람을 자발적으로 퇴직시킴으로써 자신의 기득권이 개혁될 가능성을 틀어막고 있다.
조직의 Organizer가 적극적으로 도덕 감정을 조율하지 못할 때 구성원들은 도덕적 목표를 기반으로 한 성장을 포기하고 이익을 추수하는 태세로 변한다. 교인을 착취하는 타락한 사이비 종교, 회사 돈을 사적으로 유용하는 사장, 시민단체나 아는 회사에 사업이익을 공급하는 선출직 및 지방공무원, 자발적 존경을 잃고 폭력을 써서 두려움을 연출하는 가부장. 이 모든 경우가 의사결정권자들이 조직을 계속 살아남게 하기 위한 개혁을 멈추고 자기들이 쥔 파이프라인을 최대한 쥐어짜는 행동들이다.
이러한 행동들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이 생존하기 위한 결정적인 포인트는 지났으며 추수하는 게 개체에게 최대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교주에게 영혼까지 묶인 교인들은 떠날 수 없으니 조직은 도덕적 파국에도 당장 소멸하지 않고 추수는 끝없는 이익을 제공한다. 회사의 경우 애초에 법인은 실존하지 않으니 최초이자 최후의 보루인 사장이 법인의 주인되기를 포기하면 누구도 그 법인의 영속을 위해 일할 사람이 없고 황폐화된다. 사장이 도덕적 비전을 포기하면 직원들은 횡령을 한다. 애초에 존재 자체가 영속화된 국가를 운영하는 공무원들은 시험(필기시험, 선거)을 통과한 순간부터 추수를 시작할 유인을 가지게 된다. 가부장은 존경을 이끌어낼 사회적 정체성의 위기가 변화의 시발점이 된다. 사업의 실패, 해고 등 배우자, 자녀들이 아버지에 의존하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개척해야 하는 순간 가부장은 존재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은 무시받을 받고 잊힐 바에 폭군이 되어 군림하기를 선택한다. 그게 폭력적인 가부장이 탄생하는 배경이다.
이런 게 커뮤니티가 무너질 때 생겨나는 일들이다. 구성원들을 도덕적으로 동기화시키는 질서를 만들기란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그렇지 못한 조직은 고육지책으로 맥락 없이 동작하는 규칙을 수 없이 만든다. 이런 고육지책의 결과는 더 도덕적으로 황폐화된 공동체다. 도덕으로 조율되는 게 아니라 악의를 틀어막는 하찮은 법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것을 구성원들은 바로 눈치채기 때문이며 엑소더스가 시작된다. 그럼에도 조직에 오래 남는 건 상대적으로 도덕적 성향이 vias 된 사람들이다. 냉정한 사람일수록 더 빨리 행동한다. 한번 흐트러진 질서를 회복하는 건 질서를 유지하기보다 더 어렵다. 그러니 그걸 회복하기를 바라기보다 당장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이상적 공동체에서 도덕 감정은 세속을 진정성 있고 자율적으로 조율해야 한다. 인간은 진정성 있고 자율적인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쉽지가 않다. 진정성은 장기간 동안 관찰해야 보이고, 자율적인 것은 언제나 혼란과 비효율을 유발한다. 좋은 회사들은 이런 혼란과 비효율을 인위적으로 일으켜 더 좋은 질서와 더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든다. (관련 궁금증이 있다면 데브옵스 관련 서적들을 추천한다) 하지만 오너십 없이 방치되는 사회와 국가에선 그런 건 없다. 개인도 모든 것을 가격의 관점으로 치환시키는 자본주의는 이 혼란과 비효율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해체되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가 진정성과 자율성을 해체하려고 들기 때문에 커뮤니티의 생존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갖추지 못한 공동체는 허울뿐이고 그 공백을 인위적 규칙, 연출된 권위로 채워야 하기 때문에 위태롭다. 심심할 때면 들리는 의사결정권자의 갑질이나 성범죄 들은 모두 이런 위태로움의 결과다.
내가 세운 기준에서 보면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요즘 세상에도 부분적으로 공동체라 부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군대는 도덕 감정을 고취시켜 사기를 높이고 이를 바탕으로 최종장엔 인간을 전투기계를 만든다. 잘 훈련된 군대는 진정성 있는 공동체다. 그 어떤 위험도 목숨을 담보한 전우애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강력하지만 자율성이 없다. 자율성의 포기엔 대가가 따른다. 전쟁이 끝나면 이들에게 남은 건 전투기계가 되기 위해 버려야 했던 감수성의 반동적인 충격이다. 가족도 여전히 전통적인 공동체로서 연명하고 있다. 뿔뿔이 흩어졌지만 혈연의 끈은 시공간을 초월해 영혼으로 엮여 있으며 진정성 있게 그들을 묶어놓는다. 문제는 자율이 부족해진 부분이다. 더 이상 가족이 생산과 소비의 단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함께 할 일이 없어 공동체로서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가족 공동체는 명절에만 존재를 연명하는 타율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잡음이 안 날 수가 있나. 그러다 보니 서로 신뢰를 잃고 최후엔 진정성마저 잃는 사고도 발생한다.
이렇게 보면 현대에서 오직 성공한 도덕감정의 활용사례는 오직 잘 나가는 일류기업뿐인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영역에서의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그건 사람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당장에 내가 생각나는 공동체들이다. 교회가 커지면 자동으로 교회를 쪼깨 익명성이 교회를 잡아먹지 않도록 하는 향린교회의 사례, 성비리로 빛이 바랬지만 박원순 시장이 비중 있게 추진한 '마을 공동체'는 나름 자신들의 의미 생태계를 꾸려나가고 있는 듯하다. (책으로 봤던 사례라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교육업계도 개혁되고 있다. 코드스테이츠같은 교육기관이 대표적 사례다. 이런 교육기관들은 기존의 학교 교육보다 훨씬 자율적이고 그 사람의 성장을 돕는데 진지하다. 졸업생(Alumni) 공동체를 이루려는 노력도 포함되어 공동체의 요소를 다분히 충족시키고 있다. 앞서 언급한 당근 마켓의 사례도 있다. 동네에서 자신의 명예를 관리할 수 있는 당근마켓의 기업활동은 지역사회의 부활로 보인다. 이들은 얼굴을 대면하고 서로를 기억할 수 있는 명예가 IT시스템으로 관리된다. 때문에 나는 당근 마켓의 프로필이 언젠가 이력서나 SNS보다 더 중요한 날이 올 거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국가나 사회 같은 담론은 이제 제쳐두고 좀 더 좁은 관점에서 개인 수준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일에서든 국가에서든 그들이 잘 조율된 도덕감정의 생태계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병적인 상태에 빠지기 쉬워진다. 그런게 소돔과 고모라로 대표되는 타락인데. 이제는 개인에 대한 진단을 하려 한다.
도덕감정의 생태계의 부재는 곧 의미의 부재라는 말과 상통한다고 봐도 다를 바가 없다. 이에 대한 이상적인 대책은 공동체를 가지는 거지만 앞서 말했듯 모든 게 해체되어서 일반적으로 부재한 상태가 디폴트가 되었으니 말처럼 쉬운 대안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이 커뮤니티를 통하지 않고도 문제를 모면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게임이 될 수도 있고 소비 벽일 수도 있다. 알코올이나 폭식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자신의 갈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그리 낯선 모습은 아니다. 성매수를 한 남자가 성매매를 공급 여성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하며 정을 붙이려고 하는 사례, P2W 게임에서 터무늬 없는 돈을 쓰며 자신의 강자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기반으로 관계를 확장시키는 욕망을 충족하는 사례. 커뮤니티는 아니지만 병적인 사회관계를 통해 감정을 표출하여 당장의 갈망을 처리하는 케이스도 있지만 자신의 세계에 틀어박혀서 그 세계 속에서 만의 안정을 도모하는 케이스도 있다.
일본의 히키코모리를 더 깊게 분석해보자 그들은 세계와 부딪혀 독립할 필요가 없는 유복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게까지 독립이 절박하지 않게 된 것은 그들이 참여할 공동체가 사라지거나 인터넷 게시판 같은 형태로 희미하게 존재해 아무도 그들에게 도덕감정의 발현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만 주면 의식주가 해결되니 자본의 축적을 가능케 할 정도로 유복한 일본 사회의 부모들은 발만 동동 구를 뿐 절박하게 그를 독립시켜야 할 절박함을 느끼지 못하고(그들 나름대로는 절박하다고 느끼겠지만 대안이 있다면 인간은 대체로 절박함을 미룬다.) 히키코모리도 그런 구조를 알고 이용한다. 공동체가 동작했다면 자연스럽게 성인으로서 격어야 할 고통을 직면하면서 해결되었을 문제다.
이론에서 언급했던 폴리네시아의 사회를 생각해보자. 혼돈과 비효율을 감수하는 이상적이고 건강한 공동체에선 일하지 않는 자를 먹이지 못한다. 사냥의 실패는 굶주림 보수적으로는 풀을 먹어야 함을 뜻한다. 공동체에 기여하지 못하고 질서를 해치는 사람은 핀치에 몰려 쫓겨날 수도 있고 뻔뻔하게 잘못도 뉘우치지 않는다면 분노에 가득 찬 동료에 의해 야밤에 머리통이 깨지는 결말만이 기다릴 뿐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상적 사회에선 주변 인물들의 적극적인 압박과 실질적 필요 속에 어린아이는 자연스럽게 어른이 된다. 이것이 수많은 오늘날 영화나 소설에서 끝없이 반복해서 묘사하는 인간의 성장과정이다.
오늘날 사회는 모든 게 쪼개지면서 발달은 각 개인의 선택적 과제가 되었다. 사람마다 싸우는 전선을 가지고 있으니 아무도 쉽게 그들을 도울 수도 없고 개인이 부담해야 할 선택의 가짓수는 너무 많아져 쉽게 문제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우리가 즐겨보는 이야기 속에선 주인공은 마물이 마을을 침략하거나 전쟁으로 인해 싸우며 성장해야 할 당위에 직면하게 된다. 학교가 폐교 위기에 빠지게 해서 아이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인공까지도 등장한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기껏해야 부모님이 경제활동을 할 수 없고 저축한 돈도 없어 스스로 돈을 벌어야하는 케이스들이다. 이런 환경속에선 개인은 스스로 마르지 않는 갈망을 가지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플랜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냥 오늘을 살고 내일도 어제처럼 살아낼 뿐이다. 이는 곧 우울로 이어진다. 바로 역기능의 시작이다.
너무 발전한 사회에서 보이는 인간의 역기능적 행동들은 도덕 감정이 제대로 된 생태계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단 징후다. 결혼하지 않은 미혼남성들의 엽기적 범행과 테러. 상승 혼이 아니면 결혼을 거부하고 그 남자의 역할을 경찰국가에게 요구하는 여성들, 스스로를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보고하는 사람들, 마약과 약물은 오용은 발달된 사회의 아이콘이다. 이런 모든 징후들은 선진국이 될수록 부각되며, 사회의 지속적인 유지에 반하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해가 하기 힘든 역기능적 사례다.
마지막으로 평소에 가지고 있던 도덕감정 회복에 대한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세계시민 같은 뜬구름을 제외한다면 실질적으로 접하는 공동체 중 가장 큰 단위는 국가 공동체다. 국가의 리더는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는 미션을 가지고 있다. 국가에서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나는 '전 국민 마니또'란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예전에 팟캐스트에서 그 콘셉트의 얼개만 들은 건데 내가 구체화해보자면 일 년에 하루는 낯선 동네 사람들과 선물을 교환하며 마실을 하는 것이다. 서로의 삶에 대해 고백하고 내년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말이다. 국가는 사람들을 매칭 하는 것과 법정 공휴일과 만남 지원비만 주면 된다. 현실적으로 5년 내에 이런 일은 벌어질 것 같지 않으니 요즘 나는 당근마켓에서 이런 만남을 꿈꾸고 있다.
관계가 일어나는 일상뿐만 아니라 소유에도 사회의 균질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 불평등을 줄이면 가장 좋지만 힘들다면, 자산 불평등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조성하는 건 얼마든 가능하다. 개인적으론 싱가포르처럼 부동산을 국유화하는 게 좋다고 본다. 필수재의 생산과 공급을 국가가 효율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을 때 국민은 저렴한 가격에 주택을 구매하고 부담 없이 가정을 꾸릴 수 있다. 모험도 아니다. 싱가포르의 성공사례까지 있으니 우리는 그 실행의 정수만 배우고 따라 하면 된다.
그 외 가족, 친구 등 너덜너덜해진 소규모 공동체들도 건강을 되찾기 위한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데, 나는 이런 부분에 있어선 상상력이 많이 부족한 편이다. 당장에 떠오르는 뉴스는 늙은 여자들이 룸쉐어를 하면서 공동체를 이루려는 모습이다. 그러다 보니 나도 가족의 대안으로 친구나 친적과 도시 외곽에서 함께 사는 꿈을 꾸기도 한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도록 여러 장치들이 필요할 것 같지만...
가볍게 이야기하고 넘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사실은 절박한 이야기들이다. 우리에게 의미를 채워줄 도덕감정의 생태계를 구성하지 못한다면 결국 상상하지 못한 역기능들이 삶을 삼킬 미래는 보장되어있으니 말이다.
P.S
회사 이야기를 하다보니 예전에 조직관리를 공부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사실 가장 재밌게 배웠던 과목인데 그 길을 선택하진 못했다. 뭔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서 이런걸 관심있어 하는 회사가 있을까 하고 말았는데 그런데 나도 실제로 일하고 보니 제정신인 사장들이 의외로 많고 의외로 조직 문화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그때 그 길을 갈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