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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비 Jun 17. 2019

내 일상에 스며든 포르투갈 여행

3. Penamacor 건축가의 식탁

2018년 2월~3월, 2018년 4월~5월, 2019년 2월~4월, 이렇게 세 번에 걸쳐 4개월 동안 포르투갈의 메인랜드, 마데이라 섬, 9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아조레스 군도에서 때로는 관광객으로 때로는 현지인들의 친구로서 그들의 생활을 여행했다. 나의 여행 기록이 포르투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애정이 깊어지는 계기가, 포르투갈 여행을 앞두었거나 고민 중인 사람들에게는 용기와 응원이 되었으면 한다.

Panamacor의 아침 하늘

포르투갈의 아침엔 알람이 필요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오늘은 어떤 하늘 일지 궁금해서 창문으로 곧장 향했다. 하늘이 맑으면 어디가 되었건 간에 거리에 앉아 볕을 쬐리라 다짐했다. 맑은 하늘을 만나기가 쉬운 곳이라서 그런지 가끔 보는 회색빛 하늘도 반가웠다. 흐린 날이면 창이 활짝 트인 곳을 찾아 거리 위의 사람들과 풍경을 눈에 담아야지 했다. 할 일이 있건 없건 맑으나 흐리나 계속 밖으로 향할 생각에 오늘에 대한 기대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식탁 위에 아침이 차려져 있고, 난로는 거실을 데우고 있었다. 출근하기에도 바쁜 아침이었을 텐데 내 아침을 차려준 정성과 배려에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이제 저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으니 이렇게 챙겨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하는 나의 문자에 돌아온 답장이 역시 포르투기쉬다. "이렇게 차려두지 않으면 너는 아침을 거를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아주 조금의 시간을 들여 아침을 준비해두면 너는 미안한 마음에라도 챙겨 먹을 사람이야. 밥은 중요해. 꼭 챙겨 먹어. 차는 따뜻하게 마셔야 해."

차를 데우고, 전날 아침에 배운 아몬드 우유와 코코넛 우유의 황금 비율을 찾아 콘후레이크와 함께 아침 식사를 마쳤다. 이렇게 세 번째 포르투갈 여행의 Penamacor에서 맞는 두 번째 아침이 시작되었다.


Penamacor는 포르투갈 센트로 지역에 해당하는 Castelo Branco 현 내에 있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나이 든 동네라는 별칭이 있다. 거주민들의 평균 연령이 포르투갈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현지인과 함께 Penamarcor에 처음 왔을 때 "꽤 핫한 젊은이들이 지나가고 있어! 저길 봐!" 하는 말에 차 창 밖을 보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지팡이의 도움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Penamacor엔 Monsanto를 인연으로 만난 호스트의 친구인 건축가가 산다. 이 건축가는 취향과 성격이 까다로운 데다가 예민하기까지 해서 윗집에 누가 사는 것이 싫어 3층 건물의 2, 3층을 혼자 쓰고 있다. 그런 분이 내게 3층을 내어주었다.


이 건축가는 Penamacor시 지방 관청 소속으로, 이 지역의 건축 관련 업무뿐만 아니라 인근의 히스토리컬 빌리지들에만 적용되는 특별 관리 규정에 따른 건물들의 인허가를 관장한다. 리스본의 벨렘 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리스보너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로 따지면 전통방식으로 한옥을 짓거나 오래된 건물을 원래대로 복원하는 일을 주전공으로 삼은지라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동굴과 다름없는 폐허 같은 집에 사는 집시들의 집을 개조하는 일도 한다. 혹은 공사를 하기 까다로운 마을에 공원을 조성하거나 마을의 상징 같은 분수를 복원하기도 하고, 교회 건물의 보수가 필요한 부분을 공사하는 일 등을 무보수로 봉사활동처럼 하기도 한다. 이 건축가는 이것에 대해 결코 잘난 체 하듯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 분과 함께 동네나 이 인근을 다닐 때 마주친 사람들이 이 분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걸 느꼈고, 이곳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자연스레 이야기하며 알게 된 사실들이다.

건축가의 사무실과 회의실 또한 한때는 버려진 공간이었다. 본인의 손으로 재탄생한 건물에서 일하는 기분은 어떨까?


"나는 보통 사람이에요.

 이상한 습관이 있을 뿐이죠."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 분의 일상은 아날로그 그 자체였다. 오래된 것을 참 좋아한다. 20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집에 살아서인지 내 눈엔 한참 낡아 보이는 의자를 "아직 70년밖에 안됐어요."하고 소개한다. 연락이 잘 닿지 않아 견디다 못한 친구가 선물해 준 스마트폰은 모셔두고 전화와 문자만 가능한 휴대폰을 쓴다. 그 휴대폰 조차도 거의 안 쓴다. 당연히 TV는 없을뿐더러, 종이 신문을 읽는다. 컴퓨터가 있지만 일 외엔 쓰지 않는다. CD로만 영화를 보고 노래를 듣는다. 집안 곳곳에 책이 쌓여있고, 손이 닿는 곳엔 늘 책을 두고 산다. 오프라인으로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일들이 온라인으로 옮겨지는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진짜 세상인 오프라인에서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육류와 당류를 섭취하면 그날로 잠을 못 자고 살이 급격하게 빠지면서 내장 기관에 큰 타격을 입는 지병이 있다. 탄수화물도 조심해야 하는지라 본인에게 맞는 빵을 사려면 50분 거리에 있는 슈퍼에 가야 한다. 갓 도축한 고기는 괜찮아서 정육점에 신선한 고기가 들어오면 이분에게 연락이 온다. 간혹 큰 대가를 치를 결심을 하고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즐기곤 한다. 반응은 즉각적이어서 곧장 혹독한 대가를 치르곤 했다. 자연스럽게 직접 요리해서 먹는 습관이 생겼고, 살기 위해 시작한 요리는 그에게 새로운 재미를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건축가의 주방엔 그의 이름표가 있었다. 직장에서 어느 날 이름표를 주며 책임감 있는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이름표를 착용해야만 한다는 지침이 내려왔다고 했다. 책임감은 이름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유일하게 이름표를 착용하지 않는 직원이었다. 이름표는 주방 가스레인지 후드에 붙여져 있었다. 언젠가 사람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주는 요리사가 되면, 그때는 이름표를 직접 만들어서 자랑스럽게 늘 차고 다닐 거라고 했다.


건축가는 오래된 것들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어딜 가든 주춧돌이나 기둥 하나만 보고도 거기에 어떤 유래와 역사가 있는지, 다른 건축 양식과는 어떤 차이가 있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신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분의 설명을 들으면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였던 돌덩이들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의 특별한 사연이 있는 무언가가 되는 것 같았다. 나도 한 때는 산속에 틀어박혀 동양의 고전인 사서삼경 속에 살아 숨 쉬는 동양 철학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기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이 건축가와의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건축가의 말을 열심히 경청했고, 즐겁게 배웠다.


고마운 마음에 두 번째 포르투갈 여행에선 작은 선물을 만들어갔다. 천연 라벤더 오일을 넣은 향초에 복주머니 스티커를 붙였다. 리스본에 사는 Monsanto의 호스트에게 전해 달라고 할 참이었다.

다행히 이 분을 다시 볼 기회가 생겨 직접 드릴 수 있었다. 복조리 스티커에 한국의 행운을 가득 담아왔다고 설명해서일까, 내 향초는 거실 한가운데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세 번째 포르투갈 여행에서 이 분을 다시 만났을 때, 향초가 가져온 행운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십 년도 전에 지인의 주택 재건축 일을 도와주었는데, 지인의 사정이 좋지 못해 약속한 보수를 받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향초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연락도 거의 없던 그 지인이 갑자기 나타나 오래 기다려줘서 고마웠다며 보수를 지불했다고 한다. 그 이후 그는 향초 아래에 돈을 보관하기 시작했는데, 앞으로 무슨 행운이 있을지 기대가 된다며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세 번째 포르투갈 여행이니만큼 이번에야말로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꼭 가져보리라는 포부를 밝혔을 때, 본인의 동네가 내겐 딱일 거라며 초대를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지냈던 침대방


돌이켜보니 여행자가 누릴만한 것이라곤 거의 없는 Penamacor로 가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이루고 싶은 목표를 세우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혹은 어떻게 해야 실패하지 않을지를 생각하면서 해야 할 것들을 착실하게 잘해 온 사람이다. 지금 당장 이것을 하고 싶지 않더라도 이것이 일주일 후, 1년 후, 10년 후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떠올리며 스스로 채찍질하는 것에도 익숙하다. 이것을 잘하는 것이 성실이고, 성실은 인간됨의 중요한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 살다 보니 종종 감당 못할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곤 했다. 그럴 때면 성실한 내 모습을 잠깐 내려놓고 싶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서 매 순간 성실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가끔은 좀 모르고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경험하고 싶어서 여행을 떠났다. 그래서 처음 포르투갈 여행을 준비할 때,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모습을 꿈꿨다.


하지만 나는 첫 포르투갈 여행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나의 성실함과 싸워야 했다. 소중한 내 시간과 돈을 가치 롭게 썼다고 확신할 수 있을 무언가에 써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온 여행인데 그래도 유익한 무엇인가를 남겨야지 않을까 하는 본전 생각에 휩싸이곤 했기 때문이다.


첫 포르투갈 여행에서 약 4주가 안 되는 기간 동안 동안 리스본(Lisbon), 몬산투(Monsanto), 포르투(Porto), 라구스(Lagos), 마데이라섬(Madeira)을 가려고 했다. 목적지만 정하고 무엇을 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내겐 상당한 나태함이었다. 이 나라에서 꼭 해야 하는 것, 꼭 먹어봐야 하는 것, 꼭 사 와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계획도 없이 떠나는 것은 무모하다고 생각했던 나였기 때문이다.


막상 포르투갈에 도착하니 여기까지 와서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계속 들었다. 내게 이런 호기심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내 눈앞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신기했고, 궁금했다. 없다고 생각했던 기운도 자꾸 생겨났다.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해야만 할 것 같은 일들이 계속 생겼다.


오늘 일정을 만들다 보니, 내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알게 되어 내일 일정도 생긴다. 그렇게 큰 다짐을 해서 겨우 비워둔 계획표가 가득 차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져서 라구스를 포기하고 리스본에 주저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빈틈없이 성실한 여행이 되었다.


'본전 찾기', '손해 보지 않기', '열심히 하기'로 점철된 보통의 나는 한 달여의 여행을 통해 포르투갈의 느긋함을 흉내 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잠시나마 새로운 나를 경험했다 한들 돌아온 일상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남들 열심히 할 때 나는 쉰만큼, 더 성실하게 살아야만 해' 하는 의무감이 생기기도 했다.


아, 여행에선 또 왜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바삐 움직였을까. 한국에서 돌이켜보니 가장 마음에 진하게 남은 것은 늘 분주한 나와는 대조적인 포르투갈 사람들의 여유와 미소였다. 그래서 다시 찾은 포르투갈에서는 먹고, 자는 것 외엔 할 것이라곤 전혀 없는 곳에서 無의 시간을 만들어야겠다고 비장하게 마음먹어야 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기 위해 찾아들어간 Penamacor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끼니 챙겨 먹기가 되었다. 나의 어머니는 평생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은 일찍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며, 내가 요리에 취미를 붙이는 일이 없도록 단도리를 하셨다. 나에게 요리란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지내며 건강하고 맛있는 한 끼를 위해, 재료를 준비하고 음식을 하는 과정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모든 식사의 시작은 수프였다. 앞에 놓인 와인을 바라보며, 이 와인은 무슨 맛일까 입맛을 다시며 식욕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일상에서의 나는 일하기 위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다. 여행에선 또 어떠한가. 이때 아니면 이걸 또 언제 먹을 수 있을까 싶어 먹기 위해 또 먹고 먹는다. '배 채우기'와 '과식 하기'를 오가다 어쩌다 미식가 친구의 추천으로 식도락을 누릴 때면, 살아있다는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순간을 매일 누릴 수 없음을 수월히 받아들이곤 했다.


Penamacor에서는 매 끼니를 사람답게 먹는 것만으로도 일상이 충만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 슈퍼 가기도 녹록지 않아 한정된 재료로 어떤 환상적인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세상 제일 중요한 일인 것처럼 고민했다. 오늘은 밭에서 무엇을 따서 먹을 수 있을지,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해치워야 할 채소는 무엇인지 한참 동안 흙 위에서 서성이거나 바위 위에 앉아 생각에 잠기며 식사 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건강하고 신선한 자연의 재료들이 주는 맛은 입과 마음을 즐겁게 했다. 같은 재료이지만 어떻게 조리하느냐 혹은 어떤 재료를 만나느냐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맛을 발견하며 내 취향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못 먹던 고수의 맛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먹다 남은 빵 껍질은 레몬즙과 다진 마늘을 넣은 뜨거운 물에 불려서 수란과 아스파라거스와 함께 고수를 곁들였다.
아스파라거스 밑부분은 가니시로 활용했다. 네 종류의 뿌리채소를 무스처럼 으깨어 스테이크와 밥을 한 접시에 내었다.
뿌리채소를 갈아서 만든 무스가 남아서 고수를 뿌렸다.
고수가 싱싱할 때 해치우기 위해 세 종류의 버섯을 함께 볶았다. 밥과 함께 고추장과 비벼 한 접시 뚝딱.
직접 담근 올리브 등장, 내가 지내는 3층에 두는 바람에 깜빡했다며 너무나 미안해했다. 초록색보다 검은색이 맛있었다.
버섯을 너무 많이 볶아서 아직도 남았다. 파스타를 곁들였다.
그래도 버섯볶음이 남아서 계란에 넣었다. 검은색 올리브를 다 먹었다.
계란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선 남은 고수를 다 털어 넣어 조리하고, 애매하게 남은 두 종류의 뿌리채소를 삶았다.
도토리를 먹고 자란 돼지로 만든 초리조가 주인공인 날엔 아삭한 채소의 식감을 살린 밥을 죽처럼 곁들였다.
건축가의 친구들이 놀러왔다. 한국식 갈비 양념에 재운 돼지고기와 버섯을 함께 내었다.


늘 깨-끗-하게 비워낸 내 접시

메인 디쉬를 마치고도 한참 동안 무언가를 더 먹곤 했다. 보통 식당에선 치즈, 버터를 빵과 함께 식전에 내곤 하지만 어떤 치즈는 후식으로 내기도 한다. 치즈 바구니에 한 가득 담긴 치즈 중에 아무거나 하나를 집어 시도해본다. 발 냄새 맛이 나는 고약한 치즈에 급하게 술로 입을 헹궈야 했는가 하면, 귀한 곳에서 온 치즈에 담긴 사연과 함께 그 맛을 천천히 음미해보기도 했다. 메인랜드에서 제일 높은 산이자 포르투갈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인 Serra da Estrela에 갈 순 없었지만, 그곳에서 나는 유명한 치즈를 먹으며 조만간 꼭 가보리라 결심했다.

디저트용 치즈 이후에도 또 다른 디저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의 식당이었다면 보통 카페나 차로 마무리를 했겠지만, 집에선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었다.

지용성 비타민 흡수를 돕기 위한 돼지 비계. 얇게 썰어 빵 위에 올려 데우니 쫄깃함과 꼬순내가 극에 달했다.
말린 무화과를 반으로 찢어 양 쪽에 아몬드를 넣어서 한 입에 넣으면 달콤하고 고소하면서도 쫄깃했다.
마카롱 사촌쯤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호두 가루로 반죽을 하고 계란 노른자로만 만든 크림을 넣은 디저트이다.
촉촉한 롤과 크림에 향긋한 계피까지, 입이 즐거웠다.

먼 곳에 있는 슈퍼에 가서 동네에서 구할 수 없는 디저트를 사 올 때면 먹기도 전에 이미 행복했다. 특히 아조레스 제도의 상 미구엘 섬에서 온 파인애플은 그 향기가 남달랐다. 파인애플이 놓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파인애플의 진한 향에 이미 파인애플을 한 입 베어 문 것 같았다.


먹을 고민만 하는 일상은 생각보다 바빴다. 아침 먹고 한숨 돌리니 점심시간이 되었고, 점심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면 곧장 저녁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또 뭘 멕여야 하나 고민하던 엄마의 마음이 스친다. 그간 살면서 이렇게까지 먹는 일에만 정성을 쏟아본 적이 있던가 싶다. 참 잘 먹고 잘 쉬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크게 애쓰지 않고도 Penamacor에서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요리를 직접 하느니 전문적인 식당에 가서 사 먹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맛있는 음식으로 탄생해야 할 귀한 재료를 내 손으로 망치는 일 없이, 많은 수의 자영업자도 살리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이 생각엔 크게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위한 음식을 직접 만드는 일의 가치를 안다.

내가 좋아하는 재료들을 가득 넣은 나만의 비빔밥이나 샐러드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부챗살 한 점을 제대로 먹겠다며 하루 동안 꿀과 다진 마늘에 재어두기도 한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가 내 자리에 올려둔 선물 같은 채소를 만나면 너무나 반갑다. 비니거나 발사믹을 뿌려 맛있게 먹을 생각에 식사 시간이 기다려진다. 이렇게 내 일상에 스며든 Penamacor를 추억하며, 오늘도 여행 같은 일상을 살 수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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