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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쿠 Oct 02. 2024

캐나다 +160, 이곳은 스몰톡 지옥

글을 쓰는 지금도 영어로 고통받는 중

Hi, how are you?


왜 이렇게 입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그냥 단순한 한 마디인데 말이죠.

제 자리 옆에는 작은 키친 하나가 있었습니다. 프로덕션 팀 매니저들이 가끔씩 스낵을 가져다 놓거나, 정수기에서 물을 받거나,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내려마시는 그런 작은 공간이었죠.


사람들은 아침이면 커피머신 앞에 삼삼오오 모여 커피 내리는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how are you'로 길고 긴, 단어로만 스몰톡인 긴 대화의 포문을 열곤 했죠. 전 그 옆에서 모니터만 바라보며 무슨 얘기 들을 저리 열심히 하나 듣곤 했습니다. 물론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요.


출근 시간이 9시 언저리였으니, 보통 9시 30분이나 10시 즈음이면 오피스에 근무하는 직원 대부분이 오전에 필요한 커피와 물을 가져갈 수 있었죠.

그러고 나서 저는 모니터에 비친 키친의 상황을 관찰하죠. 혹은 기지개를 켜는 척하며 키친에 누가 없나 살피곤 했습니다.

더 이상 누구도 오지 않겠다 싶을 때, 그때가 바로 제 차례입니다.


이렇게 글로 쓰려니 너무 서글픈 생각이 드는데요. 사실 이 것도 저의 생존전략 중 하나였습니다.(구차하지만..) 저도 아침에 당당하게 키친으로 가서 여러 친구들과 스몰톡으로 하루를 열고 싶었죠. 하지만 how are you 다음으로 이어지는 대화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주위 형들과 친구들은 그럴수록 더 자신감 있게, 뻔뻔하게 해야 한다고 했지만, 자신이 없더라고요.



몇 번 시도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뒤에 대화를 이어가지 못할 때, 그리고 상대방 친구가 오히려 더 알아들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더욱 위축되곤 했죠. 미안하기도 했고요. 그런 후에 찾아오는 자괴감은 하루종일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아침의 첫 시작을 이렇게 시작할 수는 없었죠.



그래서 그나마 찾았다는 방법이, 

외국 친구들 피해다니기..


보통 슈퍼바이저나, 팀 리드들과 작업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괜찮았습니다. 작업적인 용어들은 한국에서도 익히 들었던 단어들이었고, 그 사이에 디렉션들은 충분히 이해할만한 수준이었거든요.

하지만 스몰톡의 범위는 무궁무진한 데다, 원어민 친구들이 사용하는 단어들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저의 외국인 피해 다니기 스킬은 정말 훌륭한 전략 같아 보였습니다.


아침의 불편함을 피해 다니니, 하루의 작업물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퇴근 후에도 크게 스트레스받는 일도 없었거든요. 그날만은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피해 다니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요. 빨리 다른 전략을 찾아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두 번째 방법은, 대화 듣기.


제 자리가 키친 옆이었다고 앞서 언급했듯이,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몇 주, 몇 달간 들었던 스몰톡의 내용들이 제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비슷한 내용으로만 이루어지는 것 같았거든요. 가장 많이 하던 대화들이, 주말에 뭐 했니? 작업은 어떻게 돼 가니? 네가 어제 보여준 작업물 멋지더라! 그곳의 펍/레스토랑은 어땠니? 등등. 사실 크게 어려운 주제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제가 알아듣지 못하는 더 많은 주제가 있었겠죠... 그리고 출퇴근하는 길에 신나게 주절 주절대며 혼자서 시뮬레이션을 했습니다.


'이때 만나면 이렇게 대화해야지'

'내가 지난 주말에 뭐 했더라'

'그 친구 만나면, 그 친구의 샷에 대해 칭찬해 줘야지'


두 번째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 어느 날 키친으로 향했습니다. 익숙한 친구 한 명이 커피를 내리려 다가왔고, 그 친구는 how are you로 스몰톡의 포문이 열었습니다.


'제발 내가 준비한 답변에 알맞은 질문을 해줘라!!!!!!!!!!!'


하지만, 기대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듯, 제 몇 안 되는 답안지에는 없는 질문을 해오더군요.


'어... 어음... sorry I can't understand'


그렇게 어색한 웃음을 남기고 우리는 서로의 자리로 돌아갔죠.  제 두 번째 전략도 통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그리고서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죠.


원하는 질문을 얻을 수 없다면, 내 답안지에 해당하는 질문을 내가 먼저 던져버리자. 대화의 주도권을 내가 가져오자. 발칙하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그리고 하루의 시작을 기분 좋게 하기 위한 저의 세 번째 전략은 먼저 질문하기였습니다.


세 번째 전략, 먼저 질문하기란. 어차피 내가 못 알아들을 바엔, 내가 먼저 질문하고 내 예상 답안지안에서 대화를 이어 나가보자 라는 생각으로 한 행동이었죠.


또 다른 어느 아침이었습니다. 익숙한 친구 한 명이 키친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더군요.


'how are you?'

제가 먼저 건넨 인사였습니다.


'pretty good thanks, how are you?'

친구의 익숙한 답변이 돌아왔죠. 자 이제 제 차례입니다.


'good good, thanks. what did you do last weekend?'

자 저의 첫 질문의 포문이 열렸습니다.


'uhhh 난 뭘 했고~ 뭐를 했고, 뭘 했어. 너 거기 가봤니?'

친구의 친절한 답이 끝나고 재차 질문이 돌아왔습니다.


'no I haven't been there, but I want to go there one day'

스카이 트레인 안에서 사람들 틈에 끼여 외우던 답변을 드디어 했습니다. 자 2차 공격 들어갑니다.


'and I saw your shot in the program, it was amazing! how did you make it?'

자 문법이 틀리던 맞던, 자연스럽던 아니던, 일단 질문을 들이밀어 보았습니다.


'oh really? thank you so much! 뭐를 했고, 또 뭐를 했어! 그리고 또 뭐를 했단다!'

친구의 친절한 답변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야 할 타이밍이란 걸 보여주듯, 커피잔에 커피가 가득 채워졌습니다.


'oh it's time to go back to my desk, see you later!'  


그 친구와 짧지만 긴 대화를 마치고 저는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기쁜 마음으로 세 번째 전략을 평가할 수 있었죠.


'그래! 이 전략은 그래도 약간은 통하는구나.'


하지만 이 방법도 열에 두세 번만 통했고, 영어로 알고 있는 배경지식의 얕음으로 인해 그 이후로도 큰 재미를 보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한 두 번의 상황을 통해,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는 있겠다 싶더라고요.


누군가는 정공법으로 공부를 해서 이겨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지만, 이 시기에 저는 꼼수를 쓰더라도 어떻게든 그들의 삶 안으로 빨리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전략이라고 말하는 얕은수들을 써가며 버틴 것이었죠. 이 후로도 계속 영어는 공부했지만, 짧은 시간 내에 그들의 대화를 다 캐치하고 제가 답변할 정도의 수준으로는 올라갈 수 없더라고요. 자괴감에 빠지는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버티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나를 쫓아내지 않는 이상 나는 여기서 버틸 거야'


그리고는 저만의 다양한 꼼수들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인 친구와 같이 대화하기. 커피 사주기. 맥주 사주기. 작업물 칭찬하기. 키친에 한 명만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다른 친구에게 질문하기. 사소한 내용들 질문하기. 등등.


이곳에서, 스몰톡 지옥에서 버텨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동안, 프로덕션 매니저가 저를 불렀습니다.


'헤이 사쿠?,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리고는 미팅룸으로 갔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다음 프로젝트에 참여해 줄 수 있겠니?'

'다음 프로젝트는 '피카츄' 야.'


응?


피카츄가 영화로 나온다고?




그렇게 저의 두 번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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