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쉼표 이야기, 조금 천천히 걸으며 살아보기.
자동차를 타고 지나다 보면 여러 가지 풍경들을 다양하게, 많이 본다. 그렇지만 무엇을 봤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사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바삐 살다 보면 뭔가를 다양하게, 많이 경험하기는 하지만 나뭇잎 색이 어땠는지, 바람이 꽃잎을 어떻게 간질이는지는 보지 못하고 만다.
돌아보니 내게, 아름답게 기억되는 순간순간들은 느린 순간이었다.
내 볼을 지나는 바람과, 지나가는 공기의 향기, 옆에 걷던 이의 낮은 웃음소리까지- 그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남을 만큼 느렸다. 행복해서 세세히 기억되는 것인지, 느려서 세세히 기억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느린 순간순간은 내게 아름다움이었다.
행복하지 않다고 절망하던 어느 날 문득, 내가 너무 빠르게 살고 있어서 이런가- 하는 생각이 내내 머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나는 다소 충동적으로 휴직계를 냈다. 몸이 아팠고, 마음도 아팠다. 사실 그때의 나는 삶 자체가 휘청휘청 위태로운 느낌이었다. 나의 선택에 몇몇은 의아해했고, 몇몇은 입을 다물었다. 아마 입을 다문 이들도 한참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할 나이에 미련한 짓이라 생각했으나, 굳이 그걸 입 밖으로 꺼내 나와의 관계를 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리라. 아무튼 나는 한 명의 동의도 없이 그저 나의 동의만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었다.
사실 지금 돌아보니 원래부터 모두의 동의는 필요도 없던 일이었다. 내 삶에 누가 동의를 하고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내 삶을 선택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일이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충고를 얹을 수는 있겠으나 그 충고를 듣고 듣지 않고를 선택하는 것조차 오롯이 나의 몫인 것을 나는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아니 어쩌면 이제야 알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내 삶에 주체적이었던 순간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안식월들에 은근히 많은 것을 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드라마를 몇 편이나, 또 아주 많은 영화를 봤다. 부지런히 걸었고, 맛있는 것도 꽤나 먹었다. 옷장 정리도 하고, 낮잠도 늘어지게 자고, 좋아하는 이들과 점심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낮술도 마셨다. 그렇게 나의 쉼표들은 어느새 100일이 가득 찼다.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부지런을 떨며 살아온 내게 -부지런에 비해 이룬 것은 없었으나- 이 시간은 꽤 긴 휴식이었는데, 단 하루도 지겹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천성인가 마침표가 아니기 때문인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나는 나의 쉼표를 꽤 좋아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또 훈수를 두기 좋아하는 몇몇이 그만 쉴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복귀하라고, 누군가가 나의 능력을 기다리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잊지 말라고.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누가 나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산 것인지를 알 것 같았다. 누군가 나의 능력을 기다리고, 응원하고, 만족해하는 것에 빠져 나는 나의 소리들을 놓치고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가 하고 싶은 것들, 내가 바라는 것들. 그리고 내 마음의 소리까지. 분명 10대의 나는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나는 월급이 결과인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타인의 평가에 심취해 나의 평가는 잊고 살았고, 업무의 성과에 심취해 꿈의 맛을 잊고 살았다.
훈수를 두는 이에게 "이제 쉬는 게 재미있기 시작했는데 복귀라뇨, 아직은 더 신나게 놀 거예요."라는 대답을 굳이 한 것은 사실 나에게 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지금부터가 정말 즐거운 쉼표일 거라고, 아직은 더 마음 편안하게 쉬어도 된다고.
맞다. 나는 조금 천천히 살아보기로 했다. 자동차를 탄 바쁜 출근길 대신 운동화를 신는 운동길을, 화려하게 차려입은 내 모습 대신 화장기 없는 수수한 모습을, 다양한 메뉴의 회식자리 대신 소박한 밥상을, 바빠서 일부러 식혀 마시는 대신 후후 불며 마시는 뜨거운 커피를 사랑하기로 했다. 인간관계나 금전적으로 조금 궁핍해질는지는 모르나, 마음이나 정신은 더욱 윤택해지리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렇다. 어쩌면 이것은 내 "백수생활"을 기록하는 소소한 일기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거창하게 "나의 쉼표 이야기"라고 제목을 붙여두기로 했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장을 담을 미래의 나에게 꼭 뭔가 이루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담담히 담은 단 한 줄의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고 미리 말해주고 싶다.
오늘도 나를 오롯이 사랑하는, 아름답고 느린 나의 시간을 축복하며 오늘의 쉼표 이야기를 마친다.
신청곡은 에릭남의 bravo! my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