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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엄마곰 Feb 05. 2022

오늘의 나에게 건네는 커피 한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알면 그걸로 충분하다.

에스프레소를 3초 정도 입에 머금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힘이 난다.

커피가 주는 힘인지 그저 각성된 나의 머리가 주는 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전히 나는 입에 머금은 에스프레소의 향을, 진하기를 사랑한다. 종종 사람들은 내게 그게 사약이지 커피냐며 스스로를 고문하는 일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고, 멋있어 보이려 에스프레소를 마시냐는 이들도 있었다.


왜 그때의 나는 "개! 취!"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왜 같이 미소 지으며 멋져 보이냐는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을까.


커피가 건강에 좋다는 입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피로회복제였는데 나조차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에스프레소를 머금은 것보다 더 마음이 쓰다. 나도 모르는 척 지나온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 마음이 하는 말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내가 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아간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알면 그걸로 충분했는데 말이다.





 






회사에 갈 때보다 2시간 정도 모닝커피가 늦어졌다. 원래라면 출근과 동시에 좀비처럼 커피 매장으로 가서 아침인사를 하고, 밤새 안녕했냐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알아서 맛있게 뽑아준 에스프레소를 받아 들고 감사인사를 하고 돌아섰을 시간에 나는 여유롭게 아침 독서를 즐긴다.  휴직 후 처음에는 아침 독서 시간에 커피를 마시곤 했는데 두어 번 시간에 쫓겨 원샷을 하고 난 후에는 시간을 조금 바꾸었다. 모닝커피라기에는 다소 늦은 커피를 더더욱 느리게 마시며 커피 한잔을 오롯이 즐긴다. 커피가 추출될 때의 향기를, 커피잔을 쥐었을 때의 따뜻함을, 입에 머금은 커피가 주는 힘을 정말 천천히, 온전히 즐긴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내가 커피를 얼마나 좋아하고 즐겨왔는지를. 아니, 정확하게는 좋아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언제부터인가 '좋아한다'라고 말하며 피곤해서 마신 것 같다. 그저 루틴이라 지켜왔던 것 같다. 혼자 오롯이 커피를 마시고 몇 주가 지나서야 생각했다. 사는 것에 치여 잊힌 '좋아하는 것'은 커피뿐이었을까.


가만히 좋아하는 것들을 돌아본다. 내가 글을 쓰고 말고를 떠나, 나는 글 자체를 참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늘 무엇인가를 읽고 기록했으며, 원고지 위에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세겨지던 나의 글씨를 사랑했었다. 지금은 누군가 좋아하는 색을 물으면 검은색이라 대답하지만 베이지색을 또 회색이 조금 섞인 경계가 모호한 파란색을 좋아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바지와 니트를 좋아하고, 추위를 몹시나 타면서도 패딩보다 코트를 즐겨 입으며 서늘한 에어컨 바람을 싫어해 한여름에도 민소매보다 얇은 긴팔을 즐겨 입는다. 양념이 맛있는 음식보다 재료 본연의 맛을 그대로 취하는 것을 좋아하고, 맥주를 한 잔씩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고 영화관 냄새가 싫어 집에서 혼자 보는 영화를 즐기는 편이다. 금세 사라질 소설보다 역사서나 인문학 도서를 즐겨 읽고, 종이책을 좋아한다. 비가 오고 난 후의 공기를 좋아하고, 눈보다는 비가 좋다.


이런 맙소사! 수십 장은 적을 수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좋아하는 것' 열몇 개를 적는 데 이틀이 걸렸다. 내가 이렇게도 좋아하는 게 없었나 생각해보다가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내어놓고,  해야 하는 것을 하나씩 채워가는 과정인가 싶어졌다. 당장 스케줄러만 펼쳐도 해야 할 일은 빽빽히 적혀있으니 말이다.


생각해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정말 그런 것인가. 해야 할 것들을 다 해내지 못하는 버거움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로막는 핑계는 아니었던가. 어른으로 산다는 버거움을 인정하는 대신 느리지만 꾸준히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적어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 스스로가 알아주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천천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적어본다. 어떤 날은 여러 개를, 또 어떤 날은 단 한 줄도 적지 못한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기도 하고, 연필을 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무엇인가를 적게 될 때도 있다. 속도가 어떻든, 몇 가지를 적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나를 소중히 대하고 있음을 내가 안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  


오늘의 나에게 따뜻하고 진한 커피 한잔을 건넨다. 커피를 온전히 즐길 충분한 시간과 함께 말이다.

커피 값은 기분 좋은 날을 보내는 어느 날의, 미래의 나에게 받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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