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나의 삶, 그 어느 페이지를 기록한다.
인생에서 커다란 수수께끼는 무엇이었나요? 최고의 소풍은 언제였나요?
그 사람을 처음 만나서 무엇을 했나요? 첫 번째 이별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가장 소중한 만남은 언제였나요?
그림책 “할머니 주름살이 좋아요”는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불러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소중하냐고, 무엇이 행복이냐고, 잘 살고 있냐고.
(이루리. <내게 행복을 주는 그림책> p.114, 그림책 "할머니 주름살이 좋아요" 편 중에서)
나는 사실은 거만하기 짝이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내가 뭔가를 쓰기만하면 책을 낼 수 있고, 내기만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다 보니 그저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평범하게 아줌마가 되고, 평범하게 엄마가 되는 과정 속에서 글을 쓰겠다는 다짐마저 잊어버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자체를 잊었다기보다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파서 보채는 아이를 두고 출근을 하는 길. 아무리 와이퍼를 흔들어도 닦이지 않는 눈물에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정말 사는 게 구질구질하다고 느끼게 될 것 같아서. 그날 저녁 잠든 아이 곁에서 아주 오랜만에 노트북을 켰다. 낡은 노트북 앞에 앉아 말도 되지 않고 문법도 맞지 않는 글을 쓰고, 오랜만에 다시 독후감을 썼다. 비록 일기는 날마다 쓰고 있었으나 그날 나는 무엇인가를 쓴다는 행위에서, 아주 오랜만에 나를 만났다. 그날의 감정은 지금도 고스란히 손끝에 남아있다. 노트북을 통해 내가 만난 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꿈꾸던 시절의 나였다.
그냥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렇게 나는 매일 저녁 일기장에서, 노트북에서, 때로는 책에서 나를 만났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여전히 나는 월급은 받음과 동시에 사라지는 평범한 직장인 12년 차의 삶을 보내고 있고, 35년 동안이나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기대어 사는 중이며, 낳으면 다 큰다는 말처럼, 해주는 것도 없는 엄마 밑에서 어느새 4살이 된 딸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는 더 이상은 사는 게 구질구질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아이와 보내는 이 하루하루가 눈물 나게 감사하고 행복하며 진짜 퇴근, 육아 퇴근 후 읽는 책의 한 줄 한 줄이 너무 좋다.
며칠 전, 매우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인 이루리 작가님의 신작, “내게 행복을 주는 그림책”을 읽다가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 내 손끝에 느껴진 내가 다시 생각났다. 아무래도 그날의 나는 나에게 지금 무엇이 소중한지, 무엇이 행복인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를 물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매일 “나”라는 책의 한 페이지를 쓰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의 일상이 어떤 날은 훗날 돌아봐도 마음이 따끈따끈하고, 또 어떤 날은 10년이 지난 후에 돌이켜봐도 “이불 킥”을 하게 되는 날로 남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내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나중에 주름살을 잔뜩 가진 할머니가 되어 돌아볼 때, “그래, 내가 이런 삶을 살았구나.” 하며 돌아볼 페이지들을 남기고자. 그런데 구질구질한 이야기 말고 행복하고 따뜻한 것만 남겨보려 한다. 내가 쓰는 나의 책이라면 조금 더 관대한 기록자가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내 삶은 주인공도 나고, 내 삶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도 나라면 좋은 기억은 조금 더 많이, 나쁜 기억은 조금 덜 기억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굳이 나쁜 기억을 많이 남겨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아파하지 않고 좋은 기억으로 조금 더 행복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그래서 오늘부터 나의 삶을 행복으로 채워보기로 했다. 내가 쓰는 나의 삶이기에 슬프고 나쁜 기억은 아주 작게, 행복하고 좋은 기억은 아주 크게 적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언제인가 나의 이야기가 끝나는 날, “아주 행복하게 살다 갑니다.” 로 기억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루리 작가님께서 적은 것처럼, 후회하지 않게 사랑하고, 후회하지 않게 행복하고,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을 말하는 사람으로 살다 갈 수 있도록.
대단히 잘 쓴 글이 아니면 어떻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을 때도 내 이름이 적힌 책 한 권 없더라도, 그저 내가 책을 읽고 나만의 글을 쓰며 행복했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삶일지도 모른다. 좋은 글 솜씨가 아니라도 아이에게 매일매일 육아일기를 써서 남길 수 있는 삶 자체가 행복한 삶이다. 오늘 나는 새로운 페이지에 나를 담는다. 평소처럼 아이를 키우고, 책을 읽고, 일을 하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래도 가장 행복한 나를 담기 위해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