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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엄마곰 Apr 18. 2022

오늘도 새로운 도서가 입고되었습니다.

오늘도 한 권치만큼 자랐습니다.

인생이란 게

오락실의 PUMP나 DDR처럼 단기간에 끝나는 게임도 아닌데,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뛰어다녔다.

목표를 설정해두고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면 세상이 끝난 것 같았고,

혹시라도 목표에 근접하면 세상이 내 것 같았다.  


- 박훌륭 "이름들"







“아저씨. 0000 아파트 000동 000호인데요~”

“아, 책 많이 오는 집! 네~”

“우리 집 택배 아닌 게 왔어요. 혹시 찾으러 다니실까 봐 연락드려요.”

“그 집 오늘 책 박스만 갖다 드린 거 같은데~”

“네 그게 저희집이 아니에요”

“아이고. 책은 다 그 집 건 줄 아나 봐요~.고맙습니다. 금방 가지러 갈게요.”


얼마 전 택배 아저씨와 나눈 대화다. 매번 출발문자, 도착문자를 보내주시니 뒷자리조차 눈에 익어버린 번호로 잘못 온 택배 박스 때문에 전화를 드렸더니 서점 박스는 다 우리 집 것인 줄 알았다는 농담을 하셨다. 하긴. 온라인서점 박스는 주 1회가량, 낱권 도서들도 주 3회는 배달오는 집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 집은 그리 번잡하지 않은 시골이고, 공교롭게도 출판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c* 택배와 로*택배를 주로 사용하니 우리 집에 자주 오는 두 택배사 아저씨들 눈엔 “책 많이 오는 집”으로 인식될 만도 하다. 지인들조차 책 뜯어먹고, 책 입고 사냐는 우스갯소리를 할 만큼 우리 집 택배 9할은 책이다.




 책. 나를 나답게 하는 도구이자, 나를 쉬게 하는 심리적인 '공간'











사실 책이란 게, 읽는 것도 맛이지만 책장에 가지런히 꽂히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도서관이라는 문패까지 달아놓은 곳답게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책을 정리하는데, 가족이 가장 많은 것은 '그림책'이다. 학생일 때도 아가씨일 때도 사 모을 만큼 그림책을 사랑했던 나는 아이를 낳고 좋은 점을 말할 때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그림책을 살 수 있다”라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아이를 기다려도 아이가 생기지 않던 시절에 그림책을 살 때마다 “아이가 몇 살이에요?” 묻는 목소리들이 싫어 온라인서점만을 이용할 때도 그림책은 한결같이 나를 토닥였다. 괜찮다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이 그림 속으로 들어와 쉬라고. 돌아보면 내 마음에 파도가 칠 때마다 내 곁에 있던 것은 늘 책이었다.


디스크를 앓고 난 이후에는 식탁에 앉거나 서서 높낮이가 조절되는 독서대에 올린, 일명 '독서의 정석' 자세로 책을 읽지만, 원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책장과 책장 사이, 1m 남짓의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책을 읽을 때 고개를 들어 어느 곳을 바라봐도 책뿐이니 마치 책의 세상에 들어와 있는 듯한 묵직함이 있었다. 마음이 아픈 날에는 그곳에 숨어들어 시집을 읽고, 위로가 필요할 땐 그림책을 집어 들었다. 잡생각이 드는 날엔 역사서를, 무엇인가 그리울 땐 에세이를 읽었다. 그럴 때면 시집은 내 등을 토닥였고 그림책은 나를 안아주었다. 역사서는 1타 강사로 변해 내 집중력을 오롯이 차지했고, 에세이는 내 옆에 앉아 종알종알 수다를 떨어주었다. 그러다 보면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종종 괜찮지 않을 때는 한 두 권을 더 꺼내 들면 충분했다. 고질병으로 더는 오래 머물지 못하지만, 지금도 종종 그 자리에 앉아있다. 커피 한잔을 들고 책장 사이에 앉아 천천히 커피를 마시다 보면 책들이 소곤소곤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긴 세월, 나의 엉덩이를 포근하게 해주었던 스마일러그는 거실에서 새 삶을 살고 있다. 말해준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약속이나 한 듯 아이가 그림책을 볼 때 스마일러그에 앉는 것을 보면, 사물이나 공간들도 제 역할을 인식하고 묵묵히 그것을 지키는 것 같다. 어쩌면 사람보다 당연한 듯 말이다.












이제 새로이 나를 키우는 식탁에 앉아 나의 함께 해온 도구들을 바라본다. 두꺼운 역사서가 덮이지 않게 도와주는 문진집게와 문진, 책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얇은 책갈피. 그리고 인덱스. (인덱스는 최대한 접착력이 없는 것으로 사는 편이며, 일부러 손에 다섯 번 가량 붙였다 뗐다를 반복한 후 책에 붙인다. 행여라도 끈적한 미련을 남길까 봐.)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도 참 한결같이 나의 공간을 채우고 있다. 책 속이 여행지라면 이 녀석들은 나의 이정표이자 여권이고, 지팡이나 배낭이기도 했던 거다.


 오늘도 나의 도서관에는 새 책이 입고되었다. 아마 나는 오늘 또 책 한 권 치만큼 자랄 테다. 우리 집 도서관이 언제까지 이리 좋을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book적book적' 하는 나의 책장은 나를 자라게 하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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