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용기 뒤에 숨죽여 울어야 했을 '엄마'들에게.
엄마는 역사 속 인물 중에 누가 제일 존경스러워?
음, 엄마는 이순신 장군?
왜? 엄마 책장에는 안중근 의사, 윤동주 시인 책도 많은데 이순신 장군님이야?
솔직하게 말하면 엄마 이상형이야. 덩치 크고 용기 있는 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위인들을 외모로 평가하는 건 좀 반칙 아니야?
아 딱 한 분만 고르는 건 너무 어려워서 그래. 좀 봐줘.
맞아 사실은 나도 딱 한 명만 고르라면 못 고르겠어. 반칙 취소.
언제인가 '당신의 빛'이라는 그림책을 읽고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빛나는 사람들'을 그렸다. 강경수 작가님은 소방공무원, 사회공헌가 등의 분들의 머리 위에 동그란 빛을 그리셨는데, 우리 집 아이는 누가 역덕 꼬마 아니랄까 봐 역사 속의 빛나는 인물들을 잔뜩 그려왔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싸운 이순신 장군, 글씨를 모르는 이들이 없도록 애쓴 세종대왕, 나라를 구하기 위해 최초의 여성비행사가 된 권기옥 비행사님, 아름다운 문화예술로 많은 이에게 기쁨을 준 사임당,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유관순, 안중근 의사. 저마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분들이라서 그분들에게도 '빛'이 난다는 것을 이해하는 아이라니. 나는 네 머리 위에 동그란 빛이 보이는 것 같더라. 나는 네 마음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찡했다.
3.1절, 잠시 방심한 사이 살짝 비를 맞은 태극기를 거둬드려 방바닥에 펼쳐서 두드리며 말리는데 아이가 다가와 손을 보태준다. 그러더니 방바닥에 펼쳐놓은 게 마음이 좋지 않으니 테이블 위에 얹으면 안 되냐고 묻는다. 따끈따끈 보일러를 틀어서 바닥에서 말리는 거라고 말을 해주니 그제야 “태극기님 비를 맞게 해 죄송합니다.”라며 얼굴이 편안해진다. 내가 열 달을 품어 낳은 아이지만, 어떻게 나보다 더 속이 깊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날이면 속으로 잠시, 청출어람이라는 단어가 어쩌면 그 시절 어느 도치맘에게서 나온 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절대 모를 '엄마의 마음'. 이토록 예쁘고 귀함을 되새기게 하는 아이라는 존재.
사실 나는 엄마가 된 후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노력했었다. 우리 엄마 마음을 이제야 겨우 알아가는 것처럼, '위인'의 그늘 저편에 있는 엄마들의 마음을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그러나 오히려 아가씨일 때보다 더욱 그분들의 마음을 모르고 싶어 진다. 그래서 그 생각의 끝은 눈물이 되는 날이 많다.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을 성모 마리아 님의 마음을, 아들에게 살 궁리를 하지 말고 정의롭게 죽으라는 편지를 남겨야 했을 조마리아 여사님의 마음을, 여장부가 되어가문을 이끌고 자식도 손자도 전쟁터로 내보낸 초계 변 씨, 이순신 어머니의 마음을, 고초를 겪을지도 모른다는 불안보다 아들의 뜻을 귀히 여겨 마루밑에 동주의 시집을 품었던 정병욱 어머니의 마음을- 그리고 미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어머니들의 마음을 가만히 헤아려본다. 오히려 아가씨 때는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았는데, 이제는 모르고 싶다.
어느새 8년째 아이를 키우지만 나는 여전히 그분들이 품었던 '엄마의 마음'을 다 모르겠다. 나는 그냥 내 아이가 귀하고, 내 아이를 사랑하고, 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쥐어주고 싶은 철부지 엄마다. 내 아이가 그저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기도하는 엄마다. 그리고 더 솔직하게는 그분들의 마음은 영영 몰라도 되니 내 아이가 가시밭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못된 엄마다.
그래, 그분들의 마음을 모르고 싶은 내 마음도 '모성'인 것을 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도 분명 나 같은 모성이 더 컸을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 길을 당연히 걷는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으셨을 거다. 자식의 걷는 모진 길이 더 질어지기라도 할까, 눈물을 삼키셨을 거다. 엄마가 되고 보니 우리 역사의 빛이 된 분들, 그 빛의 가장 어두운 곳에 선 엄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언제인가부터 나는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하게 한' 분들께 감사할 때, 그 어머니들도 떠올려보게 된 것이다. 감사하다고, 그러나 저는 그 마음은 모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와는 아주 먼 누군가였던 위인들이 누군가의 아들, 딸로- 과거의 어느 순간 같았던 역사가 여전히 흐르는 시간으로- 바꾸어 생각하니, 감사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매 순간이 감사할 일이 된다. 어느새 역사는 나에게 감사함을 가르치는 가장 묵직한 교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