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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엄마곰 Apr 02. 2022

엄마와 나, 둘만의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것은.

엄마, 욕이 떠오르는 순간순간 나랑 커피 마셔도 괜찮아.

엄마와 함께 느끼고 엄마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작업이다.

엄마에게 감사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

아팠던 부위에 흔적이 남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상처는 아문다.

그런 후 우리는 자신이 엄마와 닮았다는 것을 더 이상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 클라우디아 하르만 "엄마와 딸의 심리학"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엄마와 대화하는 시간이 많이 늘었다. 물론 육아휴직을 하기 전에도 엄마가 아이를 봐주시니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맞대고 살았지만, 바쁘다 보니 아이에 대한 브리핑에 가까운 대화였던 듯하다. 간밤에 있었던 일과 오늘 유치원에 챙겨 보내야 될 것들, 저녁에는 아이가 하루 종일 먹은 것과 아이와 할머니가 보낸 시간들. 서로에게 업무일지를 전달하듯 바통터치 시간에 나누던 대화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다. 물론 지금도 아이의 이야기가 물꼬를 튼다. 이젠 아이와 할머니 단 둘이 보낸 시간이 그리 많지 않기에 엄마는 회장님처럼 나의 보고(?)를 받는다. 그러면서 찻물을 끓이고 마주 앉아서는 진짜 대화를 하는 것이다.


나는 주로 책을 읽은 이야기나 반찬 이야기를 한다. 이제는 눈이 침침해 책을 읽기 어렵다는 엄마에게 내가 읽은 책 이야기를 내어주고, 엄마의 레시피를 받는 격이랄까. 반면 엄마의 이야기는 시간여행을 한다. 어느 날은 어제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몇십 년 전으로 훌쩍 떠난다. 둘 다의 찻잔이 빌 때쯤이면 엄마는 멋쩍어하며 “네가 옆에 살아서 별말을 다한다. 근데 속이 시원하네.”라는 말을 한다. 매번 이런 투의 말을 하며 미안해하는 나의 엄마. 분명 엄마는 내가 아기일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조건 없이 품어줬을 텐데, 정작 당신은 켜켜이 먼지 쌓인 아픔을 풀어내면서도 슬퍼하기보다는 미안해한다. 딸에 대한 사랑이 더 커서 미안한 것인지, 세월이 흘러 아픔도 꽤 아둔해진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이 꽤 시리다.


긴 세월, 엄마는 “괴롭힘 당하는 며느리”였다. 아직도 참으로 정정한 할머니는 60이 훌쩍 넘은 며느리를 아직도 괴롭힌다. 본인이 김장을 안 한다고 해서 김치를 담아 갖다 드려도 1월쯤 배추 사 오라는 짜증을 부리거나, 오랜만에 겸상하는 엄마의 밥을 굳이 찬밥으로 바꿔치기하는 등 그 수법도 유치하다.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런 유치한 괴롭힘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할머니는 여전히 정정하다. 그뿐인가. 평생을 종교인으로 살며 때 타지 않은 탓에 엄마 말만을 철석같이 믿고, 오빠가 '그 많은 월급'을 받아서 엄마에게 100만 원 정도씩 척척 못 가져다주는 이유를 도저히 모르는(!) 시누이와 수십 번 직장을 바꿔대느라 환갑이 되도록 엄마 집에 얹혀사는 시동생까지 합세하여 엄마를 들들 볶아댔다. 툭툭 털거나 대거리라도 할 수 있는 성격이면 덜 곪았을 것을, 그러지 못하는 무른 사람인 나의 엄마는 징글징글한 "김 씨 일당"들 괴롭힘을 꾹꾹 눌러오느라 여기저기 참 아프다. 40년의 세월을, 어느새 마흔이 다 된 '옆에 사는 딸'에게 조금씩 털어내는 거다. 그러면서도 매번, 그 끝은 미안함과 눈물로 얼룩이 진다. 난 이제라도 들어줄 수 있어 다행인데 엄마는 미안해한다.


오늘은 수술 후 마취도 덜 풀린 엄마에게 반말을 찍찍하며 돈을 빌려달라 했던 막내 삼촌 이야기를 들으며 “엄마, 내가 왜 작가가 못 되는지 알았어. 이 책에 나오는 딸들처럼 사연이 없어서야. 이 책에는 엄마가 딸을 그렇게 들들 볶아대. 엄마는 나를 왜 볶지도 않았어, 쓸 글도 없게. 그러니까 엄마 이야기라도 좀 쓰게 김 씨 일당들 이야기 좀 잘해봐” 하며 커피를 한잔 더 내렸다.


엄마 옆에 붙어살며 엄마와 이렇게 수다를 떨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아빠도 모르고 언니도 모르는 이야기를 엄마와 나, 둘만이 공유한다. 때때로 나는 왜 그때 한소리 쏘아붙이지 못했냐며 격분하기도 하고, 속상함과 안쓰러움이 뒤섞여 눈물을 엉엉 흘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는 같이 울고 욕도 하다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것으로 대화가 마무리되는데, 그럴 때 나는 속으로 '엄마의 슬펐던 날 하나가 스르륵, 모래처럼 날아가면 좋겠다.' 생각한다. 엄마가 꽁꽁 담아두느라 곪은 것들을 내게 드러내서 터트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엄마를 한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은 어른이 된 것 같다. "엄마와 딸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읽는 내내 조금 더 나은 엄마, 조금 더 나은 딸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나를 보며, 그래도 어제보다 조금 더 컸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엄마와 수다를 떨 수 있는 이 시간들이 참 감사하다. 엄마가 참아왔던 순간순간들에 내가 너무 어렸던 것이 미안하다. 이제라도 엄마 마음에 욕이 떠오르는 순간마다, 엄마가 나랑 커피를 마시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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