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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발자취를 따라

조병화, 박두진 시인의 문학관 탐방을 다녀와서

by 정석진


은행 동우회에서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안성으로 문학탐방을 갔다. 교대역에서 출발한 버스를 타고 30여 명이 동행했다. 글사랑 책사랑이라는 문학 관련 모임에서 주최한 행사였는데 그곳에 사는 회원 한 분이 가이드를 했다. 그분은 사학을 전공해서 해박한 역사지식을 가졌고 안성에서 배출한 주요한 인물들을 꿰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작가들에 대한 폭넓은 지식으로 문화해설사 못지않게 진행을 해주어 참가자들에게는 의미 있고 유익한 탐방이 되었다.


방문했던 곳은 조병화 문학관과 박두진 문학관이 주요한 장소였다. 먼저 조병화 시인의 문학관을 찾았다. 그곳은 시인의 생가였고 생전의 집필 장소였다. 바로 그 장소에 문학관이 들어섰는데 매우 흥미로운 점은 생전에 본인이 스스로 건립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작가의 묘소도 있었다.

산아래 위치한 문학관 주변에는 그분의 발자취가 가득했다. 그곳에는 본인의 묘뿐 아니라 아내와 모친이 함께 묻힌 묘역에는 시비와 철쭉꽃과 조각이 어우러져 누가 봐도 예술가의 향기가 묻어났다. 건물도 한 동이 아닌 몇 동이 더 있었고 부지가 꽤 넓었다.

조병화 문학관 뜰에 핀 홍화산사나무

그분이 시인이 된 것은 맹자의 모친 같은 어머니의 공이 컸다. 세 번째 처로 시집을 와 아들을 제대로 키우려고 자녀들을 이끌고 서울로 상경하여 뒷바라지를 했다. 모친의 열성과 지극 정성의 보살핌의 결과로 이름이 있는 문인이 된 것이다. 그분은 원래 문학 전공자가 아니었다. 공학도로서 시를 썼다. 그는 다른 시인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엄청난 다작을 했다. 시집을 무려 53권이나 출간을 했다. 그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시를 썼다. 또한 미술에도 조예가 있어서 그림에도 뛰어났다. 직접 그린 그림들을 보니 색채 감각이 뛰어났고 인물의 캐리커처도 상당히 수준이 높아 보였다. 그런 여러 가지 사유로 우리나라 문단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대부분 시인들이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삶을 사는데 반해 그는 의사인 아내로 인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세계를 일주하다시피 여행을 다녔다. 거기에 경희대 교수로 재직했고 계관시인의 칭호를 받기도 했다. 여러 면에서 그는 질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시선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당당히 걸었다. 살아생전에 문학관을 건립했으며 본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까지 제정했다. 시비를 가장 많이 세운 시인도 조병화 시인이라고 한다. 다른 이들의 평판에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한 자신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가 펴낸 수많은 시집을 보며 그의 열정에 탄복했다.

조병화 문학관
편운재

또 다른 박두진 문학관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세웠다. 문학관 해설사를 통해 박두진 시인에 대하여 많은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박시인은 1939년에 창간된 순수 문예잡지 문장을 통해 등단했다. 그 과정이 자못 흥미로웠다. 정지용 시인을 통해 그가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가 문장지를 처음 접하고 그간 자신이 쓴 시 300여 편을 모두 불에 태웠다고 한다. 문장지의 작품과 비교하여 본인의 부족함을 절감한 것이다. 그 이후 치열한 노력으로 문장지에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시가 실리게 되고 계속해서 등재됨으로 등단하게 된다. 잘 아는 대로 그는 박목월, 조지훈도 문장을 통해 등단하게 되는데 후에 세 작가는 청록파 시인으로 일컫게 된다.

앞 줄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박두진 시인의 서예작품과 수석

그는 놀랍게도 서예에도 아주 뛰어났다. 한학을 한 부친의 영향으로 서예를 하게 되었고 많은 글을 남겼다. 서예에 대한 식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예작품들의 수준은 범상치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글을 쓰다 막히면 탐석을 나갔다고 한다. 수석을 사랑해서 그와 연관된 시집을 발표했다. 문학관에도 그의 수석이 전시되고 있다. 자신이 글을 쓴 도자기도 많이 전시되었다. 예술가들은 하나만 잘하지 않고 다방면에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박두진 문학관

일생에 걸쳐 글을 썼던 이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것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두 군데 문학관 탐방을 마치고 드는 생각은 글을 쓰려면 치열하게 써야 한다는 것과 예술은 상통한다는 점이었다. 미술이 그렇고 서예가 그랬다.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을 품고 있기에 두 작가의 문학관 탐방은 굉장히 의미가 있었다. 그분들의 치열한 글쓰기에 대한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발간된 책을 보며 예술혼을 느낄 수 있었다. 조병화 시인의 끊임없는 창작열과 처절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갈고닦은 박두진 시인의 삶이 굉장한 자극이 되었다. 특히 박두진 시인은 글을 쓰는 것이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는 문구가 강하게 뇌리에 남는다. 이왕 글을 쓰는 것, 즐겁게 쓰겠다는 다짐과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열심을 품고 꾸준하게 쓰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박두진은 시를 쓰는 일을 신나는 일이라고 여겼다. 시를 쓰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렵고 괴로울수록 오히려 즐겁고 신이 나며 쓰고 싶은 주제가 너무 많기에 이런 두려움과 즐거움이 바로 시인, 작가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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