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세 번 교육을 받는 일정이 생겼고 거기에 약속까지 겹치면 직장인보다 더 바쁜 은퇴자의 일상이 된다. 한 주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빨리 흐른다. 아내도 정기적으로 일을 하고 있어서 요사이 부부가 함께 하는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다.
오늘은 토요일, 별다른 계획이 없어서 아내와 집 근처에 있는 천장산 둘레길을 돌기로 했다. 날도 화창하게 개어 집안에만 머물기에는 너무 아까운 멋진 날이었기 때문이다. 유월에 들어서서 계절은 완전히 여름에 들어섰다. 한낮의 햇살은 오뉴월 땡볕답게 피부에 따갑고 자외선도 강해서 오전에 다녀오는 것이 한결 나을 것 같아 아침도 거른 채 길을 나섰다.
아내와 같이 아파트를 나서는 데 상쾌함이 밀려온다. 아침은 뻔하지 않는 신선함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똑같은 바람이라도 아침에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질적으로 다른 느낌이다.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맛 좋은 물맛 같다고나 할까. 몸과 마음도 새날을 맞아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것이니 아침에는 기대와 설렘이 있다. 똑같은 풍경도 새로움을 입고 기분 좋음을 선사한다. 오전의 여유로움을 자연에서 보내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는 것 같다.
아침풍경
천장산은 도심 속 섬 같은 작은 산인데 한예종 캠퍼스가 자리하고 있고 조선 왕릉인 의릉이 있는 곳이다. 홍릉 수목원과도 연결되어 있다. 최근 들어 천장산 하늘길이 만들어져 홍릉 숲까지 돌아볼 수 있다. 숲뿐 아니라 가는 길도 좋다. 한예종 캠퍼스를 통해 천장산을 오르게 되는 데 입구에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에는 수련이 한창 꽃대를 올리고 떨기꽃이 꼭 등불처럼 피었다. 못에는 늘씬한 창포가 호위병이 서있듯이 큰 키로 자라고 주변 소나무와 작은 누각과 잘 어울린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목가적인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수련
아름드리 소나무가 자란 숲으로 들어선다. 원래 소나무 아래에는 다른 식물들이 자라기 어려운데 물이 흐르는 곳인지 작은 풀들이 한데 모여 띠를 이루고 있다. 소나무의 피톤치드 보다 더 강력한 물이 있어 풀들이 난관을 극복하고 자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다 보니 바닥이 다져져 나무뿌리가 돌출되어 있다. 최소한의 길로만 다녀야 식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고 숲해설사 교육을 통해 배웠다. 이렇듯 마구잡이로 길을 내면서 다니는 것이 얼마나 나쁜 일인지 굳은 바닥과 팬 길과 드러난 뿌리가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연보호에 대한 실제적인 교육과 홍보는 정말 중요하다. 사람들이 명확한 지식과 정보가 있다면 분명히 주의를 하게 될 것이다.
산을 오르는 너무도 많은 길을 보며 걱정을 안고 산마루에 올라 능선을 타고 숲 속을 걸었다. 우거진 숲 속으로 다녀서 숲그늘이 햇살을 가려준다. 자연을 바라보기만 해도 면역력이 올라간다고 하는 데 이렇게 숲을 걸으니 몸에는 얼마나 좋을까? 아내도 힘든 내색 없이 밝은 모습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는다. 2킬로 남짓한 거리여서 홍릉 수목원까지 돌았다.
수목원에서는 나무를 한 가지라도 똑똑히 알고 싶었다. 침엽수림을 돌아보며 가문비나무, 전나무, 섬잣나무, 분비나무, 화백이라고 표찰이 붙어있는데 구분이 정말 어렵다. 나무들이 다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다. 한 번 봐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다음 기회에 더 배우는 것으로 했다. 이보다 더 헛갈린 것은 낙우송과 메타세쿼이아의 구분이다. 암만 봐도 그 나무가 그 나무다. 두 나무의 구분에는 잎이 마주 나는 것이 메타세쿼이아라고 했는데 낙우송도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쉬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나무에 대해 남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아는 게 없다.
딱총나무 열매
늦게 핀 산딸나무
특별한 만남도 있었다. 말로만 듣던 대나무 꽃을 보았다. 꽃은 여느 꽃처럼 색조를 띄지 않고 대나무 잎이 빗자루처럼 갈라져 작은 먼지떨이 같이 보인다. 100년마다 꽃을 피우고 죽는다고 하는 데 대나무들이 확연히 생기가 없어 보인다. 대나무 숲으로 보여도 한 개체라는 설명을 들었는데 정말로 숲 전체가 하나인 것처럼 모두 꽃이 피고 시들어 가고 있었다.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자연의 신비로운 섭리를 눈으로 만나는 시간이었다.
꽃이 핀 대나무
봐도 모르는 점이 주눅을 들게 했지만 그래도 숲 속에 들어와 나무를 관찰하고 초본 식물들을 돌아보는 것이 좋았다. 벤치에 앉아 숲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무런 잡념도 들지 않고 편안하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식물의 이름이 세심하게 안내가 되어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완벽을 바라는 것도 욕심이다. 딱총나무에 붉은 열매들이 두드러진다. 꽃들이 그다지 보이지 않았지만 푸르름이 넘쳐나는 무성한 숲 자체가 꽃보다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자주 이런 시간을 가져야겠다. 한참을 걸었더니 배가 고프다. 맛있는 점심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하는 발길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