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ica Jun 03. 2019

월급에 취해 현실은 모른 척?

한 나그네가 막막한 광야를 걸어가고 있었다. 느닷없이 성난 코끼리가 나타나 놀란 나그네는 혼비백산해 도망치려는데, 저 앞에 우물이 보였다. 나그네는 허둥지둥 달려가 우물 아래로 늘어진 등나무 넝쿨을 붙잡고 매달려 코끼리를 간신히 피했다. 그런데 우물에 매달려 아래쪽을 굽어보니 바닥에 커다란 독사들이 득실대고 있었다. 독사들은 곧 나그네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기겁한 나그네가 우물을 나가야 하나 싶어 위쪽을 올려다보는데, 코끼리가 여전히 우물 옆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나그네가 잡고 있던 넝쿨을 흰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쏠아대는 모습이 보였다. 쥐에 쏠린 넝쿨이 끊어지면 나그네는 발밑에 우글대는 독사에게 물려 죽을 것이고, 그렇다고 우물 밖으로 나가자니 성난 코끼리가 근처에서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때 머리 위 나뭇가지에 얹혀있던 벌집에서 달콤한 꿀이 나그네 입술 위에 한 방울씩 똑똑 떨어졌다. 나그네는 달콤한 꿀맛에 잠시 위태로운 현실의 시름을 잊었다. 


빈두설경에 나오는  안수정등(岸樹井縢) 이야기를 그린 그림


불교의 가르침에서 나오는 ‘안수정등(岸樹井縢)’ 이야기다. 직역하면 절벽의 나무와 우물 속 등나무 넝쿨이라는 뜻으로, 우리 인생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성난 코끼리는 세월이며, 흰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 넝쿨은 우리의 생명줄, 우물 아래 독사는 죽음, 달콤한 꿀은 욕망을 뜻한다. 


안수정등을 표현한 그림을 처음 본 것은 11살 때였다. 이상하게도 어린마음에 깊이 각인됐고, 종종 생각났다. 이 그림은 어른이 되어 직장에 다니면서 더욱 강력하게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월급이라는 꿀에 취해 넝쿨이 끊어져가는 줄도 모르고 아무런 대비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밀려나는 상사를 봤을 때 특히나 이 그림이 떠올랐다. 사회생활 3~4년차 때 일이었다. 나는 절대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회사가 나를 밀어내기 전에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만들고 싶었다. 회사 탈출을 꿈꾸었던 것은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내 인생을 주도하며 살고 싶었다. 누가 내 부서이동이나 퇴사시기, 은퇴시기를 정해주는 대로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을 때 원하는 것을 읽고 쓰면서 살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인생을 살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달리던 중 회사 생활 스트레스로 마음의 병을 심하게 앓고 있을 무렵, 고맙게도 꾸준한 생활비 창출 시스템이 완성됐음을 알았다. 무사히 회사 탈출을 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 즉 회사 탈출 자금 시스템이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스물다섯 살에 창업했다가 넉 달 만에 2,000만 원을 말아 먹었던 것으로 미뤄볼 때 내게는 사업가 소질이 없는 것도 확실하다. 아마 대한민국 직장에는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툭하면 “이놈의 직장 때려치우고 내 사업이나 할까”하고 외친다. 회사 일이 재미도 없고 직장생활은 스트레스가 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만 떠나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고는 소질도 자금도 능력도 부족한데 홧김에 사표를 내거나 갑자기 명예퇴직 통보를 받고 준비 없이 치킨 집을 차렸다가 퇴직금을 날리는 비극을 겪는다. 그러니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일단은 회사에서 차근차근 제2의 삶을 준비하면서 월급을 최대한 활용해 회사 탈출 자금을 창출하는 시스템을 확보하는 쪽이 오히려 더 현실성이 있고 위험이 적은 게 아닐까. 


우리가 처음 취업했던 이십 대 나이에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오해였음을 깨닫기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서서히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1차 은퇴, 즉 회사 탈출 후에 미리 준비된 회사 탈출 자금을 기반으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책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전 세계 곳곳에 생겨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국내에서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 같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이라는 용어가 생겼을 정도다.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마흔 전후에 조기 은퇴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었다. 


나를 여기까지 이끈 동력은 사실 두려움이었다. 내가 준비 안됐을 때 갑작스럽게 직장 생활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내 전 직업이었던 기자는 수명이 짧은 직업이어서 나는 항상 내 뒤에 성난 코끼리가 쫒아온다는 생각을 하며 일하고 공부하고 또 투자했다. 다행히 생각보다 일찍 회사 탈출 자금을 창출하는 시스템이 완성되면서 막 마흔둘이 되었던 2018년 1월에 회사를 무사히 탈출했다. 경제적인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나는 하마터면 회사를 더 오래 다닐 뻔했다. 


모든 사람이 다 나처럼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방식도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