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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이 정치의 변수가 될 수는 없다

수권법과 탄핵부결 사태

by 심소소 Dec 08. 2024

1.

흔히 나치가 독일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얻고 체제를 전복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전간기 독일의 정치적 판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나치는 체제의 혼란과 반유대주의 바람을 타고 1933년 독일 하원 총선에서 288석을 차지해 히틀러를 총리의 자리에 올렸으나, 288석은 하원 전체 의석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숫자였다.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 공산당 등의 정당 역시 의석의 30%를 얻어 독일 국민들이 좌파에 대한 적지 않은 지지를 보여주고 있었고, 독일 중앙당, 독일 국가인민당 등의 다른 우파 정당들이 약 20%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좌파는 당연히 나치에게 적대적이었고, 자본가나 융커, 군부와 같은 기득권 역시 체제 전복을 기도하는 듯한 나치의 정치색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원집정부제에 가까운 바이마르 체제에서 대통령인 파울 힌덴부르크의 존재는 나치에게 부담이었다. 육군대장 출신인 힌덴부르크는 1차대전의 영웅으로 전국민적인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독일 군부의 절대적인 충성을 얻어, 당의 사병(이른바 '돌격대')을 이용한 폭력을 전횡하던 나치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1933년 총선 이후 나치는 의회 제1당이 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권력을 독점하고자 했으며,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수권법이었다. 의회가 아닌 정부에게도 입법권을 부여하고, 심지어 헌법과 다른 내용의 법률안조차 제정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삼권분립을 기반으로 하는 바이마르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법률안인 수권법의 제정 과정에는 다소의 폭력이 있었다. 수권법 제정을 위하여는 총 의원 2/3의 출석, 출석의원 2/3의 찬성이라는 요건이 필요했고, 나치 단독으로는 합법적 통과가 불가능했다. 나치는 먼저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빌미로 공산당 소속 의원들의 출입 자체를 금지하였고, 수권법 표결이 이루어지는 의사당을 돌격대 대원들로 하여금 둘러싸게 했다. 그러나 수권법의 제정에 폭력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것은 정치적 역학 관계와 정당들 간의 밀실 합의였다. 나치를 견제할 수 있던 유일한 세력인 힌덴부르크는 노쇠하여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엘리트로서의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반좌파적인 나치당의 이념에 어느 정도 공감하였으며, 히틀러에게 개인적인 매력을 느끼기도 해 나치의 정치적 성장을 묵인하였다. 수권법 제2조는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독일 행정부가 헌법에 정한 것과 다른 내용의 법률안을 제정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대통령의 권한을 변경할 수는 없다고 규정하였는데, 이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힌덴부르크를 회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좌파 정당들을 제외한 나머지 우파 정당들을 회유하기 위해 수권법 제5조는 해당 법률안이 1937년 4월 1일까지만 효력을 발휘하는 한시 법률안임을 명시하였다. 독일 중앙당의 의원들 일부는 수권법에 거세게 반발하였으나 당 지도부는 나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사회민주당과 표결에 참여조차 못한 공산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들이 수권법에 찬성함으로써 총 647석 중 444석의 찬성, 94석의 반대로 수권법은 통과되었으며, 이미 나치가 장악한 상원에서도 수권법의 제정이 가결되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수권법이 공포되었다. 


당연하게도 나치는 정당들과의 합의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 나치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물론 우파 정당들 역시 갖가지 수단을 이용해 해산시켰고, 수권법 통과 3달 후에는 '정당신설금지법'을 제정하였으며, 기존 의회를 해산한 후 단원제인 새 의회를 구성하였는데 의원들은 모두 나치 소속이었다. 수권법의 제정이 당시 바이마르 체제하에서 합법적이었는 것인지의 여부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적어도 의회는 의결 요건을 갖추어 수권법을 통과시켰고, 이 점에서 혹자들은 수권법의 제정을 '민주주의의 자살'이라 부른다.


2.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빙자한 친위 쿠데타, 그리고 국민의힘 의원들의 표결 불참으로 인한 탄핵안 부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수권법의 제정을 떠올렸다. 대통령이 군을 동원해서 헌법이 정한 의회의 권한을 정지시키고자 했다. 그 진의가 무엇인지는 영원히 대통령 본인만이 알 것이나, 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비상계엄이라는 외피를 뒤집어 썼다거나, 도저히 정상적인 쿠데타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끝나버렸다는 이유로 대통령의 행위가 쿠데타가 아니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이없고 황당하지만,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있을 수 있고, 어쩌면 대한민국 헌정사상 마지막 쿠데타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쿠데타는 힘을 이용해 현행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고, 당연히 현행 헌법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권력행위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기만적인 말 역시 이런 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친위 쿠데타는 실패하였고, 대통령은 헌법의 수호자라는 스스로의 지위를 포기했다. 형사적인 처벌과는 별개로 스스로의 역할을 방기한 대통령에 대한 헌법적인 처벌, 그 당사자에게 헌법이 부여한 권한을 박탈하는 처벌이 필요하다. 그러한 처벌은 헌법을 배반한 자에게 헌법의 수호자 지위를 부여할 수 없다는, 헌법에 내재된 당연한 논리적 귀결에 따라 요구되는 것이고, 헌법은 그 처벌의 수단을 국회에 부여했다. 헌법 제65조 제1항에 규정된 대통령에 대한 탄핵권이다. 이미 자신의 약속을 어긴 대통령이 한 말을 믿을 수 없고, 한번 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이 두번 시도하지 못하겠느냐는 당연한 지적, 탄핵소추를 통한 권한정지 외에는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할 법적인 방법이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 외에도, 국회는 대통령에 대한 헌법적 단죄를 위해서라도 대통령을 탄핵했어야 한다. 헌법의 수호를 포기하고, 헌법이 부여한 권한을 오히려 헌정의 파괴를 위해 사용하려고 한 대통령의 존재를 헌법이 용인할 수 없기에, 탄핵을 통해 이를 보여주었어야 한다. 형사적 단죄가 예정된 야당 대표가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었다거나, 집권 여당이 또다시 궤멸적인 피해를 입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킨 이상 당연히 일어날 일로서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집권 여당이 당연히 감내해야 결과인 것이고, 이러한 결과를 회피해 보겠다고 대통령을 탄핵에서 구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의 정치 상황에서 탄핵은 정치적 상수이고, 집권여당은 탄핵에도 불구하고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 뿐, 탄핵이 정치적 변수가 수는 없다.


3.

그럼에도 국회는 탄핵을 변수로 만들었고, 이를 부결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집권여당은 어떻게든 버티려 할 것이고, 야당은 이를 막아세우기 위해 총력전에 나설 것이다. 대통령은 헌법이 자신에게 부여한 권한을 그대로 보유한 채 국가의 수반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킬 것이다. 시간이 지나 상황이 변화하면, 그래서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적 상황이 만들어지면, 물러나있던 대통령은 또다시 말을 바꾸고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려 것이다. 대통령의 성격이나, 지금까지의 행동들, 그리고 권력의 당연한 속성에 비추어 봤을 때도, 당연히 예견되는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현실도 별 것 아닐지도 모른다. 설령 대통령이 다시금 발톱을 드러내더라도, 언젠가는 권력이 물러나고 상황이 회복될 것이니까. 그런 정치역학적인 관계 말고, 어제의 탄핵 부결이 우리 헌정사에 어떤 의미로 남게 될 것인가. 헌법은 상처 입고, 굴욕을 당했다. 자신을 거부한 대통령이 자신이 부여한 권한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국회가 이를 용인했다. 헌법을 수호할 책무가 있는 또다른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이, 헌법과 국회법이 정한 절차와 권한에 따라 탄핵안을 부결시켰다. 헌법을 위반한 대통령이 헌법기관으로서 남아있는, 헌정 국가로서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상황이, 법에 따라 정당화된 것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유불리를 위해서 탄핵을 변수로 만들었기 때문에.


현실은 모순적이고, 극도의 논리를 추구하는 법 역시 모순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다. 헌법이라고 어찌 모순이 없겠느냐마는, 이 사태에서 발현된 모순, 헌법을 부인한 자가 헌법에 의한 권한을 보유하는 상황이 헌법기관에 의하여 추인된 이 상황의 모순은, 헌법의 근원을 흔들고 위협할 정도로 너무나 크고 뿌리 깊다. 이미 스스로의 한계, 정치적 유불리가 달려있다면 헌법적 모순조차 용인된다는 한계가 선명히 드러낸 헌법이, 앞으로 자신의 권위를 자랑스럽게 뽐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대한민국이 사람이 아니라 법에 의해 통치되는 헌정국가라고 당연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의 헌정은 모순에 빠졌고, 극단적으로는 2024년 12월 7일 오후 9시 20분에 멈춰버리고 말았다. 정치적 유불리를 위해 탄핵을 변수로 만들어버리고 만 결과는 헌정의 타살, 혹은 자살이다.


4.

전후 독일은 과거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민주주의 자체에 적대적인 세력을 민주주의가 용인할 수 없다는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발전시키고,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제1조 제1항으로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되지 않는다. 이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국가권력의 책무이다.'라고 규정하고, 제3항에서 '다음에 열거하는 기본권은 직접 적용되는 법으로서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구속한다'고 못박아 국가권력의 헌법에 대한 충성의무를 강조하였다. 우리 헌법 역시 탄핵심판제도 및 정당해산심판제도를 통하여 방어적 민주주의 요소를 도입하였지만, 헌법이 스스로를 지키기엔 아직 충분치 않다는 게 분명히 드러났다. 모든 것들이 그렇듯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에도 약점이 있고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헌정의 자살이라는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개헌을 앞두고 많은 논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수권법 표결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수 오토 벨스가 남긴 연설로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우리 사회민주당은 이 역사적 순간에 인간성과 정의, 자유,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밝힌다. 수권법이 당신들에게 영원 불멸의 이념을 없앨 수 있는 힘을 주지는 못한다. ... 또한 사회민주당은 이 박해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박해받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제국 내의 동지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여러분의 의연함과 충직함은 존경받을 만하다. 여러분들의 확신에 찬 용기, 끊임 없는 확신은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 우리의 자유와 생명을 빼앗을 수 있지만, 우리의 명예를 빼앗지는 못한다."

위 연설문은 한국어 위키피디아에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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