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언제 따뜻했던 적이 있어요?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는 생각 전환

by 라다

모든 시기는 결국 지나가고 그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그때에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나의 불행으로 등한시하고 있다면 당장 집중할 수 있는 행복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현명하다.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미화되고 또 추억이라는 것은 멀리서 보면 모두 아름다운 한 때의 역사적인 일이 될 뿐이다. 너무 과하게 어떤 일에 몰두해서 상처받는 일은 길게 봤을 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내가 보고 듣고 먹고 느낄 수 있는 좋은 쪽으로 집중하는 것이 후회도 없고 나에게 가장 좋다.



나쁜 생각, 안 좋은 마음, 남을 비판하는 태도, 무기력함에 빠져 나아가지 못하는 것, 현실 속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에 몰두해서 후회하는 일, 난 왜 이럴까라는 자기 비하, 현재의 상황에서 겪는 어떤 부정적인 일에 대한 집중은 절대 해롭다. 긍정적인 생각은 못하더라도 생각과 마음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 잡아야 한다.



* 비가 와서 우산이 없다.


-> 난 왜 우산을 안 챙겼을까 탓하지 말고 왜 하필 오늘 비가 오는 거야 짜증 내지 말고 주변 사람에게 우산을 빌리거나 우산을 사거나 택시를 타는 액션에 집중해야 한다. 비를 맞기 싫다면 비를 맞지 않기 위한 행동을 해야 한다. ​​비가 와서 우산 없는 나에 심취하면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비를 맞고 계속 제자리걸음일 뿐이다.





* 회사에서 모르는 업무를 담당해서 고통받는다.


-> 난 왜 이런 회사를 다니고 있을까,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을 시킨 것일까 탓하지 말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직장 동료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업무적으로 지식이 필요하면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함.


지금 안 하면 언젠가 해야 했을 일이고 지금 남이 한다고 해도 결국 내가 언젠가 경험해 봐야 하는 일이다.

처음부터 알아서 잘하는 사람은 결코 없다. 하지만, 내가 변하지 않으면 결국 잘할 수도 없어.

이 세상은 내가 불만족하고 불충분하게 생각하는 일들이 많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다. 나를 옥죄이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결국 나를 더욱 힘들게 하는 일이고 진흙탕에 빠져 가만히 있으면 계속 빠져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나오려면 도움을 요청하고나 혼자 신발을 벗고 나오거나 기어서라도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는 액션을 취해야 한다.


​​

의도와 계획대로 인생을 설계하고 살 수는 없지만 무근본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든 되겠지의 삶의 태도는 요즘 세상에서 먹히는 방법은 아니지만 나를 위한 정신에는 참 좋은 마인드이다.


우리의 현실은 늘 냉정하게 파도가 친다. 파도가 언제 따뜻했던 적이 있는가? 파도는 늘 거칠고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다. 우리가 그 파도에게 따뜻하고 온화한 부드러움을 바라는 것은 너무나 역설적인 일이듯이.


사회에게 따뜻함을 바라기에는 이 사회가 이미 너무나 차가운 파도가 되었다.



생각해 봐. 우리는 파도에게 따뜻했던 적이 있어?


없잖아.


파도가 치면 피하기만 했잖아.



이 사회라는 것은 유치원생들이 놀이터에서 하는 장난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한테 친구가 때렸다고 이르고 울고 불고 난리 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까 사람들이 화를 내고 울고 짜증 내고 소리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나도 그들처럼 격정적으로 할 필요는 없다. 이 모든 일들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저 그에 맞서 내 상황에 맞춰 싸울 뿐이다. 싸움이라는 것을 또 치열하게 할 필요가 없다. 나의 에너지를 아끼면서 최소한의 액션으로 적당하게 치고 빠지는 것이 이득이다. 과도한 감정 낭비의 피해자는 결국 감정 소모자다.​​


조금은 냉정하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발전할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불평하고 화를 내서 달라지는 것은 상처받는 내 마음뿐이다. 때로는 외면과 회피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때도 있지만 그러지 않고 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의 속뜻은 피할 수 없으니 즐길 정도로 더 열심히 더 적극적으로 그 일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피할 수 없는 일을 끝낼 수 있으니까.

타인의 어떤 삶의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굳이 안 해도 되는데 나는 타인의 삶을 걱정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너무나 한심하고 멍청해서 왜 그렇게 살고 있냐며 그들에게 자극을 주고 싶은 때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내가 대하는 태도가 다르고 그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감히 내가 침범할 수 없는 것을 지키는 행동을 예의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어떠한 범위의 경계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보이는 적당함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보이지 않아서 누군가 예의를 넘어 침범하여 어떤 혼란을 만들기도 한다. 이 혼란은 더욱 큰 분란을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어떠한 새로운 시각으로 화합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상대의 삶에 끼어드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타인의 삶에 등장하는 것은 연극에서만 해도 충분한 일이다. 실제로 삶의 영역에 누군가 등장하는 것은 만든 삶의 극본에 끊임없이 불필요한 애드리브를 치는 배우의 과한 액션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연극이 아닌 실화니까.

막이 내리고도 지속되는 커튼 뒤의 삶은 우리의 인생이니까. 연극은 막이 내리면 끝이라도 나지.


나도 내 인생의 막을 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이어가는 이유는 지금 막을 내리기에는 나는 아직 못한 연기가 너무 많다.



쉽지 않지만 수많은 일과 감정을 감당하다 보니 결국 정답을 이거였다. 어떤 선택의 후회나 상황의 불행은 부여잡고 있으면 더욱 악해지는 독이다. 아니다 싶은 것은 흘려보내는 것도 필요하다. 맞지 않는 신발을 아무리 신어도 까지고 아플 뿐이다. 이 신발이 안 맞으면 다른 신발도 신어봐야 하고 신발로 걸을 수 없다면 날아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왜 맞지 않은 신발을 계속 신고 아파하며 신발을 만든 사람을 탓해?


그 사람이 당신만을 위해 만든 신발이 아니라면 맞는 사람에게 신을 수 있도록 이제는 그 신발을 그만 벗어요.


​​

가장 많이 들은 말이지만 지키기 어려운 분수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이렇게 고난이었다. 하기사 분수를 정한 것은 애초에 내가 아니었으니까.

요즘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달라졌다.

이 세상에 좋은 사람은 없고 나쁜 사람도 없다.


한결같은 사람은 어떤 모습이라는 것을 늘 똑같이 유지하지 않는다. 다만, 속에는 어떤 사람을 상대하든 흔들리지 않는 본인의 한결같은 주관의 줏대라는 것이 우뚝 서 있는 것이다.



나도 내 마음에 그 어떤 바람이 불어도 잎이 흩날리지 않는 나무를 마구 심어 놔야겠다. 그 어떤 공해가 내 숲을 오염시켜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 나만의 든든한 나무를 뿌리까지 단단하게 깊은 곳에 마구 심어야겠다.


지치면 마음에 나무 심기.


결국 작은 나무도 자라면 큰 나무가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