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편의점은 아니지만
일요일에는 마트 문을 안 연다.
유럽에 살면서 가장 난감한 일은 아마 일요일에 마트 문이 안 여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마트가 문을 안 여는 경우가 없고 또 문을 닫은 새벽에 급하게 살 물건이 있으면 집 앞에 24시간 편의점에 가서 살 수 있는 당연한 일이 유럽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토요일에 미리 필요한 물건들을 사 두고 미리 사둬도 상하지 않는 샴푸나 치약 같은 생필품은 쟁여두는 버릇이 생겼다.
처음에는 일요일에 마트 문을 열지 않는 사실이 적응이 안 돼서 마트에 가서 문 앞에서 휴무라는 문구를 보고 헛걸음하며 집에 돌아온 날들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도 이곳은 편의점이 있다. 24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주말에 휴지, 간단한 먹거리, 물 정도는 구매할 수 있다.
갑자기 생리대를 사야 되면 어떡해?
여자들이라면 알 것이다. 자궁의 생리 시작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주기가 일정한 편이라도 어느 날은 일주일 예정일 보다 빠르게 호르몬의 변화가 시작된다.
두꺼워진 자궁 내벽은 내가 버튼을 누른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문을 닫는다고 못 나오게 할 수도 없으니 그저 몸에서 호르몬이 하라면 하라는 대로 나는 생리대를 차야 한다.
며칠 전 일요알 낮에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속옷이 축축해서 날씨가 더워서 그랬나 싶었는데 화장실에 가보니 대자연의 파티가 시작되었다. 붉은 핏자국들이 까꿍 하며 호르몬의 등장에 나는 생리대를 찾았다. 이럴 수가... 일주일 후에 시작 예정이고 지난달에 생리대를 다 쓰고 똑 떨어져서 집에 단 하나의 생리대도 없다.
대충 휴지로 긴급처방을 하고 집 앞에 편의점에 달려가서 생리대를 찾았지만 생리대가 안 판다. 생리대도 없으면서 도대체 이걸 편의점이라 할 수 있는 거야? 황당했다. 나에게 편의점은 없는 것 없이 다 파는 곳이 편의점인데 실망했다.
오, 나에게는 약국이 있었어
뜨거운 햇빛 탓인지 호르몬의 활성화 때문인지 겨드랑이는 이미 겨터파크가 활짝 개장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어떡하지?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혹시 생리대가 있냐고 물어봐야 하는지 너무 난감했다. 이 사람들도 급하게 생리를 할 텐데 마트가 문을 닫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지? 난 오늘 생리대를 못 사면 어떻게 하루를 보내지?
그때 머리에 스친 생각 하나가 있었다. 어쨌든 이것도 응급상황이니까 약 같은 존재가 아닐까, 약국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었다.
다행인 건 집 근처에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곳이 있어서 생리대를 구매할 수 있었다. 에어컨이 나오는 약국에 들어가서 생리대를 발견하고 나는 ‘정말 살았구나! 오늘도 약국 문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속으로 환호했다. 생리대를 구매하고 드디어 안도했다.
한국 보다 저렴한 가격에 편의점의 편리함은 없지만 가격은 편리하다는 장점을 배웠다. 득이 있으면 실이 있고 모든 것에는 반드시 득만 있지는 않구나.
8개 들었는데 1,500원 정도다. 확실히 한국보다 저렴하다.
익숙함에 속아 편리함의
소중함을 잊지 말자
한국에서 당연하게 누리던 편리함과 익숙했던 일이 해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되고 낯선 일이 된다. 이렇게 또 편의점은 아니지만 약국에서 생리대를 살 수 있다는 작은 것의 존재에도 감사하고 소중함을 느끼게 됐다. 한편으로는 내가 한국인이라서 한국에서 당연하게 누리던 편리함을 못 누리고 유럽에서 불편하게 사는 것이 맞는 건지 회의감이 들었다.
유럽에 살다 보니 나는 미리 필요한 물건들을 사 두고 편의점 보다 약국을 더 가까이하는 변화를 갖게 되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지.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한국 보다 조금 불편할 뿐이지 못 살겠는 곳은 없다. 어쩌면 나는 과한 편리함에 익숙해져 약간의 불편함도 크게 불만을 가졌던 것 같아서 반성했다. 이렇게 나의 유럽 생존 스킬이 향상되었다.
어쩌면 한국의 빨리빨리의 문화가 발달한 것도 빠르게 무엇이든 즉시 할 수 있는 생활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저의 생생한 유럽 일상은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