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차 사수의 퇴사

사수가 퇴사하면 회사 속 내 세상이 망할 것 같았다.

by 라다

어느 날, 아침에 출근해서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업무 단톡에 뜬 메시지 하나가 나의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여러분, 조금 있다가 회의실에서 봐요. 제가 할 말이 있어요."

아, 올 것이 왔다. 드디어 사수가 퇴사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예감이 100% 적중했다.

회의실에 모여서 처음 사수가 한 말은 바로

"제가 이직을 하게 됐어요. 미안해요."

"다음 주까지 근무하고 이번 주는 이틀은 인수인계받으러 이직할 회사를 가서..."


나는 사수의 퇴사를 이미 2주 전부터 눈치를 챘고,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사수가 없다는 상상을 했다.
연차도 꽤 있고 경력도 있으니 여기보다 더 좋은 회사를 갈 것이라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얼마 전 승진에 누락된 사수는 적극적으로 퇴사를 결심하고 이직 면접을 보러 다녔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얼마나 일을 못했으면 승진에서 누락됐을까
도대체 어떤 실수를 했길래 승진을 안 해준 걸까
나도 사수처럼 승진을 못하면 어떡하지

사수없이 이 회사를 계속 다니면 내 인생은 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왠지 모르게 사수의 미래 = 나의 미래처럼 보였다.

유일한 막내 (여자) 직원이라서 그럴까?

그래서 이런 생각으로 나는 불안감에 휩싸였을까?

부장님이 사수의 모든 업무를 다 나한테 넘기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
아니, 어떻게 5년 동안 하던 일을 단 며칠 만에 신입 5개월한테 다 넘긴다고?

내가 그만큼 잘할 것 같아서 내가 믿음직스러워서?
아님
정말 막무가내로?

사수의 도움으로 업무를 다른 동료들과 분담해서 나눠 갖게 되었다.

“쟤 그거 시켜”

“쟤 그거 할 줄 알아?”


“그 어디 회사에서 인턴 했었대요”

“그럼 시켜”

여러분, 이게 좃소입니다.

좃소에서는 뭐 좀 안다고, 뭐 좀 할 수 있다고 하면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작은 것을 할 줄 알아도 능력자가 되는 마법이 펼쳐집니다. abc만 알아도 영어 능력자가 됩니다.

포토샵 할 줄 알아도 못한다고 하세요.
다 시킵니다. 월급은 쥐똥 만큼 받으면서 일은 왜 코끼리똥처럼 시키냐고요? 좃소잖아요. 회사는 인건비를 가장 아낍니다. 가성비 따져야죠.

해외여행 한 달 다녀와도 영어 잘하는 줄 압니다.
아니, 무슨 통번역 학과가 괜히 있는지 알아요?
번역도 기술이고 지식입니다. 감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고서 캐나다 여행갔다 왔다는 이유로=영어 잘한다. 모든 영문 번역을 다 시키게 된다.






아무튼, 사수가 퇴사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수의 업무를 나눠 갖게 되었다.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되는데 그동안 사수의 업무 실수, 업무 태만이 다 드러나고 있다.

실수해도 괜찮은 일이 있고, 실수하면 혼나는 일이 있는데 그동안 실수해서 혼나는 일은 다 알고 있었지만
실수해도 괜찮은 일은 다 몰라서 완전 대충 했다.

그로 인해 사수가 뿌린 똥을 남은 사람들이 치우게 됐다. 하루하루 뭔가 일이 터져서
어떤 일이 망쳐있어서 원인을 찾아보면 사수가 저지른 일이었다.

사실 5년 차, 사수가 승진에 실패한 것은 회사 문제도 분명 있지만, 사수의 잘못이 아예 없다고도 말을 못 하겠다.

여기서 걱정되는 것은 나는 사수처럼 되지 말아야지.
나는 사수보다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야지.
사수처럼 실수하지 말아야지.
일을 잘한다는 소리는 못 들어도 일 못해서 승진 누락되는 일은 없어야지.

요즘은 이런 생각으로 이 회사에서 견디려고 한다.
우리 동기들끼리 버틴다고 하지 말고 견딘다고 하자고 했다. 버틴다는 어감보다 견기는 것이 더 멋있어서! 그렇다. 우리는 견디는 중이다.

사수가 그동안 정말 일을 대충 한 건지 아님 퇴사를 앞두고 정신없어서마음이 떠나서 일을 건성으로 하는지 모르겠지만,아무리 떠나더라도 마무리는 좋게 하고 나가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회사에서는 사수의 퇴사로 후임자가 나로 공식 임명됐다.그동안 사수를 보면서 내가 저 일을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업무들을 그대로 내가 고스란히 물려받게 되었다. 정말 피하고 싶었던 일들만 맡게 되었다.






사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퇴사를 하는 이유는 승진에서 누락되었기 때문에
그 승진의 누락 이유는 나의 작은 실수들이 누적되었고 강력하게 임원급 상사가 나를 인정하지 않아서 승진을 못하게 됐다.

또, 이 회사에서 다양한 업무를 경험해서 경력, 커리어 성장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에 비해 월급이 아주 적기 때문에 적당히 경험을 쌓고 나가기에는 괜찮은 회사라고 했다.

크게 를 건드리고 뭐라 하는 사람이 없으니
경력 쌓고 이직하세요.

그래서 내가 일부로 나중에 이직하면 도움되는 일들을 많이 넘겨줬어요.






사실 사수의 업무를 맡으면서 정말 일다운 일을 하게 될 것이고, 나는 앞으로 일이 없어서 퇴사하고 싶은 생각은 안 할 것 같다.
오히려 나에겐 더 많은 일을 알게 되는 좋은 기회이고 더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상황이다.

다만, 내가 혼자 해보지 않은 일이라서 어려워 보여서 겁을 먹어서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이겨내면
미래의 나는 지금 견뎌낸 나를 잘 참았다고 잘 견뎠다고 칭찬하지 않을까

지금 이 두려움과 불안함에 도망쳐버리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


사실 사수와는 개인적인 친분, 동료 사이의 친분도 있지 않다.
그냥 사수와 후임 사이로 이야기를 다른 동료들보다 많이 하고,
유일하게 회사 내에서 친구가 없어서 우리 둘이 친구가 돼서 옆자리에 앉아 밥 먹는 사이?

그나마 다른 사람들보다 사수와 나는 가까웠다. 친하다는 표현보다 가까운 사이가 맞는 것 같다.
그래도 사수는 나에게 늘 최선을 다해서 알려주고 도와주고 챙겨줬다.
나에게 유일하게 관심 가져주고 내가 놓치는 것은 없는지 계속 서포트해줬다.








그동안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순간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사수가 있어서 버텨왔는데,
믿었던 그리고 의지하던 존재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펐다.

경력이 무기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사수는 여러 회사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나도 사수처럼 나만의 경력,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을 꼭 만들어야겠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사수도 해낸 일을 내가 못할까? 그런 두려움보다는
그동안 사수가 업무 공유를 안 해서 같이 해 본 적이 없는 업무들을
이제는 사수 없이 스스로 정말 닥치는 대로 하게 될 텐데 그 업무를 내가 정말
하고 싶어서 하게 될까 의문이 든다.

하기 싫은 일은 절대 안 하는 나라서
하기 싫은 업무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게 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운 것이다.






사수가 인수인계를 따발총처럼 말로 다다다 다닥 해 버리니까 습득이 잘 안된다.
차근차근 문서화해서 다시 설명해준다고 했으니까 그때는 나도 더 집중해서 들어야지.

마음이 급한 사수는 이것도 저것도 다 이야기해 주고 싶어 하는데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은 크지 않다.
음식물이 넘친다는 말이다.

조금씩 담아서 다 먹고 또다시 담아야 한다.
욕심부리지 말고 천천히 해 주세요.


나에게 사수는 그래도 5년 경력으로 엑셀 업무와 업무 꿀팁들을 많이 알고 있는 진정한 직장인이었다.
능숙하게 전화 업무를 하고 진상을 상대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꼰대 상사들에게 꾸지람을 듣고 혼이 나도 강력한 멘탈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일을 했다.

무능력한 부장을 두고 거친 현장 사람들과 불도그 같은 이사를 상대하면서 본인이 할 일은 다 해냈다.

알고 있는 것이 많고 다른 회사를 가더라도 디테일한 꼼꼼함은 부족할지라도 이 직무에 있어서
업무 경력이 풍부한 사람이라 사수의 미래를 응원한다.


부디, 이 회사보다 좋은 회사를 가기를 바라고 혹여 이 회사보다 안 좋은 회사라도
사수가 행복하길 바란다.

앞으로 사수가 퇴사하기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남았고,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이 물어봐야겠다.

사수가 없어도 어떻게든 일은 하게 될 것이고 문제가 생겨도 해결은 될 것이다.

사수도 처음부터 나처럼 잘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죽기야 하겠어, 잘리기 밖에 더 하겠어?"라는 마음으로
강하게 회사에서 견뎌야겠다.

내가 이 회사에서 얻을 것은 업무 경험밖에 없다.

사실은 매일매일 이 회사에서 퇴사하고 싶다, 그만두고 싶다 말하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런 생각들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만

업무 경험, 경력이 없이 나가면 또다시 신입으로 취업 준비생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돌아가느니 차라리 이 회사를 다니는 것이 나아서이다.

그렇다고 이직의 가능성을 정말 묻어둔 것은 아니다.

이 회사에서 나의 생명은 하루살이다.
당장 내일 회사에서 나의 존재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나는 회사를 나갈 마음이 항상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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