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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Dec 22. 2021

죽도 밥도 아닌 연애

별 거 아닌 연애의 단상 #4

대희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자혜는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욕실 문 사이로 뜨거운 기운이 훅 빠져나왔다. 바디워시 냄새가 난다. 사과향이다. 용기엔 코튼 어쩌고라 써 있을 거다. 겉과 다른 속이 다른 모텔 바디워시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마저 자혜는 싫었다.


"아직 11시 안 됐네. 지금 나가면 전철 탈 수 있겠다."


자혜는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얼른 혼자 있고 싶다. 해외직구 카페에서 윈터 세일 품목도 보고, 노답 연애 상담 전문인 쓴소리 언니의 유튜브도 보고 싶었다.


"역까지 바래다줄게."


안 그래도 되는데. 자혜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희는 평소와 다른 자혜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서둘러 겉옷을 입고 휴대폰을 챙겼다. 놓고 가는 게 없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럴 때만큼은 미어캣처럼 민첩하다.


"내일은 별일 없어?”

"퇴근하고 집에 가야지. 요즘 너무 늦게 다녀서 엄마가 뭐라고 해."

"그럼 회사 끝나고 잠깐 얼굴만 볼까?"

"카톡 할게."


모텔을 나온 자혜와 대희는 신촌역을 향해 걸었다. 역까지 가는 길에 떡볶이와 어묵을 파는 노점상이 줄 서 있었다. 앞접시 하나에 간장을 덜어놓고 어묵을 찍어 먹는 회사원 커플의 표정에 다음 일정에 대한 기대감이 느껴졌다. 어느 회사의 김주임이나 이대리일 거 같은 남자가 역시 이주임이나 김대리일 거 같은 여자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남자의 손 위로 여자의 체인 드롭 귀걸이가 달랑거린다. 왜 저런 귀걸이를 했을까? 단 몇 초 시선이 머물렀을 뿐인데 자혜는 습관처럼 이런 생각을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길에 서서 허기를 채우는 커플의 다음 일정은 보나 마나 모텔일 거다. 저들은 어떤 모텔에서 밤을 보낼까. 늦었으니 대실 말고 숙박을 하겠지? 가족에겐 무슨 핑계를 댈까. 자혜는 방금 본 커플이 J모텔 203호에서 섹스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겉옷을 벗고, 여전히 목에 걸려 있는 사원증을 보며 웃다가, 서로 번갈아 샤워를 하고...


열차가 도착했다. 어디선가 바깥 내음을 잔뜩 묻히고 온 사람들이 서둘러 승강구로 향했다. 자혜도 모텔방의 쿰쿰한 냄새와 함께 개찰구를 통과했다. 대희는 개찰구 밖에서 손을 흔들었다. 한 달 전, 집 근처 역 앞에서도 같은 모습이었다.


헤어지자고 할 때마다 역 앞에서 보자고 하는 것은 대희의 루틴이었다. 할 말만 하고 바로 지하로 숨어버릴 수 있는 지하철역을 택하는 게 참 대희스러웠다. 별로 추운 날도 아닌데 반쯤 굳어버린 핫팩을 손에 쥐어주는 것도. 이제 그만 만나자며 먼저 울어버리는 것도, 축농증 환자처럼 연신 코를 훌쩍이는 것도, 지겹도록 반복되는 헤어짐의 장면이었다.


***


"왜?"


PT 자료에 넘버링 하는 것처럼 헤어짐의 시도에도 넘버링을 해야 하지 않을까. (헤어짐_2 / 헤어짐_수정 / 헤어짐_수정완 / 헤어짐_최종)  이렇게. 이번이  번째 시도인지  기억도  난다. 헤어지는  이렇게 꾸준히 시도하면서,  다른  꾸준히 시도하지 않을까? 대희는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패딩 차림이었다. 수염은 일부러   건가. 증거 인멸에 실패한 용의자가 취조를 앞둔 모양새다.


"너도 알잖아. 지금 내 사정이..."

"예전엔 사정이 안 그랬어?"

"그냥. 더 나아질 거 같지 않아서 그래. 너 나이도 있고."

"... 여기서 나이가 왜 나와? 나 너랑 동갑인데?”

"넌 여자잖아. 서른셋이면 결혼할 나인데."


퍽. 자혜의 머리가 주스팩이라면 지나가는 차바퀴에 짓밟혀 터진 것 같다. 뇌수가 줄줄 흐른다. 자혜는 스물아홉에 대희를 만났다. 대희도 스물아홉이었다. 스물아홉, 서른, 서른 하나, 서른둘은 결혼할 나이가 아녔을까? 서른셋은 특별히 결혼을 해야 하는 나이인가? 자혜는 대희와 결혼할 수 있을까?


"그런 말은 2년 전, 3년 전에 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

"니 사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달라진 게 뭐 있어?"

"미안해. 실은 전부터 계속 얘기하고 싶었는데... 회사 그만둔 뒤로 모은 돈이 없어. 0원이야."


자혜는 놀라는 표정도 짓지 않았다. 대희의 재정 상황은 손님 없는 가게의 카운터 금고처럼 빤했다. 들어오는 돈은 없고 나가는 돈만 있으니 모은 돈이 있을 리 없었다. 학원을 그만둔 후로 재희의 고정 수입은 기초생활수급자의 생계 급여만도 못한 수준이었다.


"그래, 도망가는 게 네 특기니깐. 지난 세월이 아깝다. 이 병신아."


자혜는 지난 몇 년 동안 마음속에 담아둔 '병신' 카드를 꺼냈다. 사무라이의 장검처럼 비장하게 휘두르고 싶었는데. 전혀 후련하지가 않다. 대희는 언제나 모든 걸 순순히 인정해 버린다. 부족한 생활 능력도, 몇 번이고 반복되는 헤어짐도, 4년이나 만난 여자 친구에게 병신이라는 소리를 듣는 상황 마저도. 전재산을 도둑맞은 사람처럼 보이는 대희를 보며 자혜는 방금 내뱉은 말을 회수하고 싶어졌다.


그냥 보통의 연애였을 뿐인데 왜 마지막은 항상 이렇게 구질구질할까. 펄펄 끓던 원망의 감정이 폭삭 주저앉는다. 대희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대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속물 같다. 좀 더 포기할 걸, 욕심부리지 말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걸. 자혜는 안다. 이게 반성이 아니라는 걸. 익숙한 굴레로 돌아가기 위해 눈가리고 아웅하는 거짓 쇼일 뿐이라는 걸.


지랄 맞은 이별을 겪고도 먼저 연락을 하는 건 늘 자혜였다.


***


자혜는 심하게 취했는지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남자 대학생 옆에 앉았다. 자꾸 고개가 넘어온다. 팔꿈치로 슬쩍 밀어내고 에어팟을 꽂았다. 멜론이 추천하는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90년대 감성 가요>다. 리스트에 토이와 성시경이 즐비하다. 먼저 헤어짐을 고한 남자들이 훗날 자신의 비겁함을 인정하며 과거의 연인을 그리워하는 노래들이다. 제아무리 김연우와 성시경이 불러도 찌질한 노랫말이 근사하게 와닿진 않는다.


내일은 대희를 만나지 않을 거다. 카페에 와 있다고 카톡을 보내도 확인만 하고 읽지는 않을 거다. 전화가 오면 받지 않을 거다. '자혜에게'로 시작하는, 에피톤 프로젝트 노래 가사 같은 메일은 더더욱 확인하지 않을 거다.


자혜는 정말 헤어지고 싶다. 대희와 헤어질 결심이다. 그런데 헤어지자고 말하는 대희의 눈빛과 표정과 뒷모습은 정말 보고 싶지 않다. '너도 알다시피 내 사정이 지금'으로 시작하는 대희의 문자를 보면 없던 노안도 생길 지경이다.


먼저 사귀자고 한 건 너잖아. 다시 사귀자고 한 것도 너잖아. 헤어짐의 시도를 번번이 무산시키는 게 누군지 잘 알면서도. 자혜는 헤어지자는 대희의 말을 반으로 갈랐다. 됐어, 이제 그만해.


모텔은 또 왜 갔을까. 자혜는 오늘따라 유독 거슬렸던 대희의 손길을 떠올렸다. 대희의 혀가 입 속에 들어오는 순간 침을 뱉고 싶었다.


내일은 먼저 헤어지자고 해야지. 옆자리 대학생의 소주 냄새를 맡으며 자혜는 다짐했다. 내일 당장 헤어지지는 못하더라도, 당분간 모텔은 가지 말아야지. 자혜는 집 앞 세븐 일레븐에서 맥주를 사서 가방에 숨긴 채 집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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