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희선 Mar 25. 2024

3월 25일

책, 그리고 질문

"나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측량할 수 없는 광활함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그것이 주는 환희에 나를 맡기는 법을 알게 됐다. 우리가 겪는 모든 확장의 중요한 부분, 소위 말하는 '자신을 넘어서고자 하는 갈망', 우리 본질의 가장 훌륭한 점인 이 모든 거룩한 갈증은 늘 새로운 체험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도록 고취하는 책의 기지에 빚지고 있다."_ 스테판 츠바이크(오지원 역)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유유, 2019, 23 쪽.

<에디터의 일>(김담유

스리체어스) 8에서 재인용.


"한 사람의 일생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어 수많은 사람이 여러 생을 거듭해 이어 달리는 항로끝에 책이라는 보물섬이 놓여 있다." _ 김담유. 10


"이미 친숙하고 범용해서 진리처럼 굳어진 가짜 현실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이가 누구인지, 생각 없는 다수가 무의식적으로 좇는 욕망에 메스를 들이대 악성 종양을 도려낼 수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아무도 듣지 못한 지식의 절벽에 약초처럼 희귀하게 뿌리내린 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발견하려면 에디터의 내면에는 질문이 강력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놓친다. 알아보지 못한다. 보호도 못 본다. 에드터에겐 질문이 곧 사명이요 숙명이다."  21.


질문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을 추구했고 내 안에서 질문이 사라지는 날들에는 살아있다는 감각을 잘 느끼지 못했다. 서른이 될 때까지 나를 사로잡았던 질문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였다. 묘하게도 질문은 질문을 낳았다. 질문이 있는 한 읽고 쓰는 일이 계속됐으며, 읽고 쓰는 한 사람과 세계는 흥미진진한 관찰 대상이었다. 시간을 들여 관찰하면 그만큼 애정이 깊어졌다. 이렇듯 질문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읽고 쓰는 일에 복무하게 되며 남을 신뢰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그들의 책을 만들게 된다.  그들이 상상하는 세상과 동화된다. 그렇게 누군가는 에디터가 되어가고 에디터로 살아간다. ㆍㆍㆍ 질문이 자라나지 않는 관계는 어떤 의미도 같이도 키우지 못하는 볼모지가 된다. 22, 23.

"에디터는 분절과 단속으로 점철된 일상의 세계를 연속된 흐름의 언어로 변환하는 일, 혹은 그 반대의 일을 습관처럼 해내야 한다. 그러자면 사변을 쳐내고 핵심 생각을 붙드는 힘이 중요하다. 작디작은 문제라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문제를 문제답게 키워 공공 의제로 승화해야 한다. 에디터의 강한 문제 의식 하나가 1만 명의 생각을 바꾸고, 10만 명의 감성을 바꾸고, 100만 명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면 오만일까? 하지만 기적처럼 그런 일이 벌어지고는 한다."  25.

" 필요하는 건 재능이 아니라 질문이다. 삶에 대한 질문, 사람에 대한 궁금증, 사물에 대한 호기심,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 앎의 도약이 주는 환희 등등. 이것은 모든 이에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질문과 호기심과 앎의 욕구는 결국 언어의 회로, 문자의 체계를 따라 움직인다. 문제는 질문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항심과 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항심이 시간을 통과하는 힘이라면, 하심우 어디서건 무엇이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다." 25.


____


보통은 내가 알고 있는 걸 확인하게 되는 책을 선호하지 않는다. 나의 무지에 균열을 내어 나를 확장시키는 책을 택한다. 나는 현재의 나를 넘어서고 싶고, 다른 이도 그리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글을 읽지 않고는 글이 나오지 않고 그래서 글을 읽고 쓰지 않는 날에는 평화가 깨진다.


이번에 붙잡은 <에디터의 일>은 내가 알고 있는 걸 확인하게 해주는 책으로 나를 위로하고 나를 찢지 않고도 충분히 감사하게 되는 책이다.


이 이야기는 다만 에디터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 그리고 작가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조너선 색스의 글과 키에르케고르 평전을 읽고 있다. 오늘 조너선 색스의 글에서 의도는 있었으나 행동하지 못한 르우벤과 수동적이었으나 절망하지 않고 기다린 요셉을 고 있다. 김담유가 말하는  항심인 듯하다.

성경을 읽는 것 만으로는 성경의 이야기가 의도하는 바를 결코 알 수 없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의 행간을 놓고 질문에 질문을 더하기를 쉬지 않으며 나눈다.  조너선 색스같은 많은 유대인 랍비들의 모습이다. 미드라쉬의 유익이다. 그들의 글에서 항심과 하심(무엇이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읽는다.

기독교의 스크라테스로   확고하게 선 것을 흔들어대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뇌하는 키에르케고르를 만난다.

작가의 이전글 3월 20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