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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유 Oct 30. 2022

내 이름을 불러주겠다

진짜 이름을 찾아서

온라인 게임 길드에 가입했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 서너 시, 늘 애매한 시간에 접속하는 나를 신기해하는 사람들에게 터키에 산다고 말했다. 거의 매일 같이 게임하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고, 서로 나누고 싶은 정보들만 파편적으로 주고받았다. 그러다 멤버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일은 따로 안 하시고, 그럼 터키에서 주부 세요?”


일을 안 하면 백수인데, 결혼은 했으니 주부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 알았다. 내가 백수인지 또 주부인지 정확히 판단해보려고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백수는 맨손이라는 뜻으로 특정 직업이 없는 스무 살 이상의 사람을 일컫는다고 한다. 번역 공부를 하고 글을 쓰며, 글 쓰는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하고 있지만 현재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지 않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백수가 맞다. 무직이 맞다. 주부는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나와 남편은 집안일을 똑같이 하고 있다. 각자의 선호도로 자연스럽게 나누어졌는데, 빨래와 설거지는 내가 더 많이 하고 청소와 요리는 남편이 더 많이 한다. 한쪽이 도맡아 하지 않으니 둘 다 주부가 아니면서 동시에 주부인 셈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조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순 없다고 했다. “직장인이 다 그렇지 뭐.”, “아니꼬우면 네가 사장해야지.”라는 말로 입을 다물게 하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입사할 때는 분명 기업에서 적극적이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사람을 원한다고 했다. 당차게 프레젠테이션 발표도 하고, 창의성 면접도 보고 들어왔는데, 막상 일하다 보니 해야 하는 일들만 가득했다. 직급이 낮으니 결정권이 없는 건 당연할 수 있지만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라며 무조건 따르라 고만했다.  


곰이 어두운 동굴에서 맵고 쓴 쑥과 마늘을 100일 동안 먹으며 인내하는 시간을 보내고 원하는 대로 인간이 된 것처럼, 오랜 시간 견디다 보면 직급이 오르고 보직장까지 달면 원하는 대로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다고 한다. 참고 견딘 곰들 중 일부에게만 아주 조금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안타깝게도 막상 그 자리에 올라가고 나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서 제 마음대로 하기 어렵다.

심리적, 경제적으로 안전하겠지만, 엄청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나마 할 만한 일을 아주 조금 할 수 있을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참고 견디기보다는 직접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해야 할 이야기를 번역하는 삶을 살고 싶다.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천부적인 재능 없이는 예체능으로 성공하기 어렵고 밥 빌어 먹기 십상이라고 말하는 부모님 밑에서 꿈을 계속 꿀만큼 용감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글 쓰는 일이 나에겐 숙명이었다고 멋있게 포장하고 싶지 않다. 그저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집안일도 하고 번역 공부를 하면서 글을 쓰며, 어설프고 엉성하게 하고 싶은 일로 일상을 재건축하고 있다.


때로는 불안해질 때도 있다. 지인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인증하는 인별그램 포스팅, 글쓰기 동료들이 알리는 책 출간 소식 등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자기 비하를 한다. 더 애써야 하는 건 아닌지, 내가 선택한 길이 맞는지 뚝딱거린다. 그때마다 2018년 친구와 온라인으로 주고받은 질의응답을 찾아본다. 10년 안에 이루고 싶은 네 가지를 적어둔 페이지를 누른다. 외국에서 살기, 글로 이야기하는 언어의 마술사, 서로의 베이스캠프가 되어 주는 동반자, 타인을 이해할 줄 아는 포용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써 있다. 4년이 지난 지금 두 가지를 이루었고, 나머지 두 가지를 이루려고 한 걸음씩 다가가는 중이다. 나는 가고 싶었던 길을 차근 차근 걸어가고 있다.  


한동안 만족할 만한 명함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내가 이루고 싶었던 것들 중 이미 이룬 것들을 되새긴다. 터키에서, 동반자와 동반 묘 둘과 함께, 행복해지려고 매일 글을 쓰는 사람. 그리고 더 이루려고 정진하는 사람. 빈 이름표에 내가 직접 이름을 적어 본다. 나를 더 나답게, 사회를 조금이나마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드는 글을 쓰고 싶은 사람. 남이 보기에 번듯한 이름이 없어도, 자랑할 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했어도, 오늘 하루 최선을 다했다면 그 이름을 다정히 불러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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