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주 간의 언어교육
한 주간의 수도 적응을 잘 마치고 자동차로 1~2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티에스(Thiès) 지방으로 이동해 어학원에서 5주 동안 현지어 교육을 받았다. 세네갈의 언어는 프랑스어와 종족어인 월로프어(Wolof)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세네갈은 과거 프랑스에 오랜 식민 지배를 받아 불어가 지속해서 통용되고 있다. 모든 현지인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 병원, 관공서에서 대부분의 의사소통과 문서 작업을 불어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외국인들이 생활하기 위해선 프랑스어를 필수적으로 익혀야 한다.
월로프어 같은 경우 세네갈 부족 중에 월로프족(44%)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공용어로 채택되었다. 월로프어를 할 줄 알면 아무래도 이 나라의 모국어인 만큼 현지인들에게 많은 관심과 호의를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한국말로 자기소개만 할 줄 알아도, 마음이 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학원에선 대부분 기간에 불어 위주로 공부하였고 월로프어는 기본 맛보기로 3일 정도 배웠다. 수업은 보통 주6일 진행됐고 시간대는 평일 아침 8시 ~ 오후 5시 30분, 토요일 아침 8시~12시 30분이었다. 빡센 일정이었지만 그나마 중간 휴식과 점심시간이 긴 편이라 잘 따라갈 수 있었다.
제공해주는 점심은 생각보다 내 입맛에 잘 맞았다. 대개 세네갈 음식은 큰 둥그런 쟁반에 맨 아래 밥이 깔려 있고 그 위에 갖은 채소, 생선 또는 고기가 얹혀 있어 이를 소스와 함께 버무려 먹는 식이었다.
교사들은 모두 친절하고 실력 좋은 현지 선생님들이었다. 실제 5주 동안 받은 언어 교육은 불어 실력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되어 일상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그렇다고 언어 구사가 완벽해진 건 절대 아니고 그 뒤로도 꾸준히 공부해 나가야 했다. 언어를 배우면 혼자서 해보고 싶었던 임무 중 하나는 식당에서 햄버거를 주문하는 일이었다.
이는 많은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택시를 잡고 위치를 기사님에게 설명하며 가격 협상을 해야 한다. 도착해서는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읽고 내가 먹고 싶은 햄버거를 고른 뒤 종업원에게 정중하게 주문하고, 이때 콜라도 함께 시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맛있는 햄버거를 먹으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순 없다. 나가면서 계산대에 현금을 줘야 하므로, 돈 계산을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센스까지 장착했다면, 종업원에게 팁을 주는 것도 이 나라 문화이다. 따라서 혼자서 햄버거를 주문할 수만 있다면, 언어교육은 어느정도 성공한 셈이다.
수업 이후엔 세네갈 가정집에서 홈스테이했다. 첫날 학원 일정이 모두 끝나고 밖에 나와보니 어떤 남자가 홈스테이 집을 안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께서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가족이 되었다는 의미로 세네갈 이름을 지어 주셨는데, ‘안드레 바지’였다. 오잉? ‘안드레’는 어디서 들어본 것 같고 ‘바지’는 청바지, 반바지, 똥 싼 바지 할 때 그 바지? 알고 보니 ‘안드레’라는 명칭은 이날 마중 나와준 형의 이름이었고, 이는 성경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세네갈에서 드물지만, 이 가정은 대대로 가톨릭 집안이었던 것이다.
‘바지’라는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 집의 아버지 성이 ‘Badji(바지)’였다. 그래서 내 이름은 최종적으로 ‘안드레 똥 싼 바지’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우리 집을 참 좋아 했는데 학원에서 지친 마음으로 돌아올 때면, 집 앞에 커다란 바오밥 나무가 항상 그 자리에 듬직하게 우뚝 서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우리 집 바오밥 나무는 동네에서 가장 유명하기로 소문난 대왕 바오밥이었다. 이렇게 큰 바오밥 나무를 언제 다시 만나 볼 수 있을까?
우리 가족 구성원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는 늘 한결같이 친절하셨고 연세가 많으신 아버지도 아침에 학원에 갈 때면 문 앞 소파에 앉아서 잘 다녀오라고 인사해 주셨다. 그리고 학원에서 저녁에 귀가하면 귀여운 조카들이 뛰쳐나와 안기며 매번 반갑게 맞아 주었다. 세네갈 가족 덕분에 늘 집에서 머물고 싶은 이유가 차고도 넘쳤다.
아이들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가장 큰 언니의 이름은 ‘까뜨리엔’, 어린 두 자매는 ‘아다’, ‘소다’ 그리고 막내 남동생은 ‘째르노’였다. 그리고 항상 나의 저녁 식사와 빨래를 도맡아 주었던 가사도우미 ‘짠’까지 모두 잊을 수 없는 나의 소중한 세네갈 식구였다.
하지만 때론 집에서 저녁을 먹는 일이 곤혹스러울 때도 있었다. 어머니와 짠이 해준 음식은 특별히 외국 식단으로 만들어 주었기에 정말 맛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뒤였다. 막냇동생이었던 째르노가 나의 음식에 탐심을 부리며 의자 뒤에 매달려 생떼 부렸기 때문이다.
처음엔 몇 점 주기도 하고 응석을 받아주었지만, 그의 횡포는 그칠 줄 몰랐다. 보다 못해 어머니는 세네갈 특유의 훈육으로 그를 혼냈고, 아이는 눈물을 그칠지 모르고 세상 떠나가듯이 울기만 했다. 이 곤란함과 긴장감 사이에서 음식을 입으로 먹는 것인지, 코로 마시는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 미안한 나머지 매번 옆에서 달래 주었던 일들이 떠오를 뿐이다. 가정의 평화를 허락하소서...
한국에서 함께 출발한 우리 동기들은 수업이 끝나고 모이기 좋아했다. 모두 혈기 왕성한 20대 현역 남자들이었고 외향적인 성향의 친구들이라 당연한 모습이었다. 반면 나는 허리가 좋지 않고 내향적인 사람으로서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충전 받고 그 힘으로 다음날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였다. (TMI지만 나의 MBTI는 INFJ이다.)
동기들이 모여서 하는 것이란 결국 술을 마시는 일이었다. 원래 신앙의 이유로 술을 꺼렸지만,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위해 이곳에서 술을 시작한 케이스였다. 처음엔 꽤 잘 어울렸고 온전히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동기들은 술을 한 번 마시면 끝이 보이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내가 원했던 술 모임은 이런 게 아니었다. 술을 강요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도란도란 모여 진실한 대화를 추구하고 싶었지만 절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결국 너무 과해서 다음날 학원에 지각하거나 수업 시간에 조는 현상도 나타났다.
가장 큰 어려움은 그들과 관계에서 나의 포지션은 애석하게도 어리바리 바보 이미지로 전락한 것이다. 나는 기수장이었지만, 권위적이지 않되 재밌고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 무시당하고 멍청이로 취급받는 걸 바랬던 건 결코 아니었다.
이에 따라 어느 순간부터 서로에게 오해와 불신이 생겼고 문제를 풀고자 하면 오히려 실타래처럼 엉켜 버리기 일쑤였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급기야 5명이었던 우리는 1:4로 나뉘면서 나는 왕따를 겪게 됐다.
현지에서 동기들끼리 똘똘 뭉쳐도 살아남을까 말까 힘든 여정을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NGO라는 소명을 발견하고 멋지게 국제협력요원이 되어 실제로 세네갈까지 왔는데, 단원들과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줄은 전혀 예상도 못 했다. 정말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사실, 돌이켜 보면 이런 문제는 단원들 사이에서 비일비재하다. 국내에서 합숙 교육을 받을 때부터 현지에서 봉사활동이 종료되는 시점까지 적게는 2명 많게는 10명 이상 같은 기수로 묶여 함께 움직이는데, 서로 살아온 환경과 배경, 나이, 성격, 종교, 성별, 식성 모두 다르므로 나와 딱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모였다고 할지라도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며 특히 열악한 이곳에선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에, 나이스한 모습을 기대한다면 이는 큰 착각일 수 있다. 그래서 해외 봉사는 실제고 생존과 결부된 전쟁터와 같은 곳으로 묘사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