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접 실습수업
방학이 끝나고 학교가 개강하면서 처음으로 현지 교사들이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나 보기 위해 수업에 참관했다. 봉사 단원의 업무는 딱히 정해진 게 없었고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가 굉장히 중요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학생들은 교육받기보다 교사들의 진두지휘 아래 휘어지거나 부러진 책걸상을 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도 학과장의 요청으로 용접 작업에 투입되었다. 분명 내가 관여하면 업무 면에서 효율적이었으나, 반면 학생들은 용접기가 한 대밖에 없었기에 구경만 하거나 도중에 사라지기 일쑤였다. 따라서 내가 용접기를 잡는 일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고, 학생들의 실습 시간만 빼앗는다는 생각이 들어 아차 싶었다.
이를 피력하는 과정에서 동료 교사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결국 업무를 조율하기 위해 쏘우(기관장)를 찾아가 최대한 학생들이 용접기를 다룰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고,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러 온 것이지, 용접 작업을 하러 온 게 아니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다행히 나의 상황을 잘 이해해줬고 그 뒤부터 학생들 위주로 작업을 진행하여 마무리 짓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의 수업을 구상하다가 현지 상황에는 다소 비경제적일 수도 있지만 전기용접과 가스절단 등 우리나라 ‘용접기능사’ 국가기술자격증 수준의 교육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학생들의 용접 기량을 끌어올려 보다 정교한 용접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좀 더 나은 직장에서 높은 연봉으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단순 ‘땜쟁이’가 아닌 진짜 ‘용접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실습수업은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느낌이었다. 쏘우와 논의 끝에 학교로부터 약간의 재료 비용을 얻을 수 있었고 실습에 필요한 철판과 용접봉 그리고 보호장구 등을 구매했다. 그다음 실습용 용접 작업대를 제작하고 철판을 잘라 연습용 모재를 만들었다. 완성된 작업대와 연습용 모재를 갖고 나니 천군만마를 가진 기분이었다. 드디어 내 수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업은 일단 기본기부터 보호구 착용 및 용접의 기본자세, 아크 내는 방법, 비드쌓기 등 학생들 한 명씩 돌아가며 1:1 과외를 해주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수업을 과연 할 수 있을지, 한다면 어떤 교육을 해야 할지 답답한 심정이었는데, 작게나마 시작할 수 있어 기뻤다. 분명 여기까지 오는데 도와주는 동료 교사들과 따라와 주는 학생들 덕분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
학생들은 나에게 종종 몇 살이냐고 묻곤 했는데, 50살이라고 뻥을 치며 대충 둘러댔다. 나이가 들통나면 얕잡아보고 수업 시간에 장난만 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며 못 믿는 표정들이었지만, 아시아인은 원래 나이에 비해 젊게 보인다고 말하자 순수하게 믿어주었다.
학생들과 조금씩 친해지며 재미를 알아가던 중, 학교는 개강한 지 얼마 안 되어 최대 명절인 ‘타바스키Tabaski’로 인해 공휴일을 맞게 됐다. 휴일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복귀했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눈을 씻고 봐도 학생들이 보이긴커녕 바닥에 쓰레기만 굴러다녔다.
파파를 찾아가 상황을 물어봤다. 파파는 저번에 대운을 빌어주었던 분으로 학교의 수의사이자 경비원이었는데, 아직 학생들이 명절을 쇠느라 돌아오지 못한 듯하다고 했다. 좀 아쉽긴 했지만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지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집에 돌아갔다.
그다음 날 아침,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학교에 출근했다. 오늘은 제대로 수업해보자 했는데, 엥? 이번에도 학생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 나라 명절은 도대체 며칠을 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설과 추석 때 아무리 길어야 주말을 끼면 최장 5일 정도였지만, 세네갈은 최소 일주일에서 열흘 이상 지속됐다.
분명 공식적인 휴일은 끝났지만, 비공식적으로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제 뭔가 좀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나의 열정만큼 상황이 뒷받침해주지 못해 매우 답답했다.
그다음 날은 의지가 많이 꺾여서인지 결국 늦잠을 자버렸다. 하지만 일찍 나간다고 수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설마 오늘이라고 학생들이 왔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학교에 느지막하게 도착했는데, 이날은 웬걸? 학생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것이다! 아 놔… 돌아버리겠네!
그동안 꼬박꼬박 지각하지 않고 나 홀로 근면하게 출근했던 시간이 무색해질 정도로 모든 게 허사가 되어버렸다. 괜히 다른 교사들과 학생들의 눈치를 보며 온종일 얼마나 진땀을 뺐던지. 한번 성실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성실해야 한다. 어중간하게 일탈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인식되므로… 하하…
우리 학과 교사들은 시간이 점점 흘러서는 실습 시간에 아예 외주까지 받아 제품을 제작하여 판매도 서슴지 않았다. 초기에는 이런 모습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 구조와 학교 재정을 헤아려보니 이런 현상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세네갈엔 딱히 우리나라처럼 산업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예를 들어, 철강, 자동차, 조선 그리고 반도체 등 굵직한 제조업 중심의 기술력이 없다. 제품 생산 시 우리나라 같으면 공장에서 기계로 대량 생산하면 그만이었다.
반면에 세네갈은 이런 일들을 길거리에 즐비한 철공소와 목공소에서 수작업으로 철 제품과 가구 제작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세네갈은 우리나라 70~80년대 기술력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또한 학교의 재정으로 학생들에게 딱히 제공할 만한 재료비가 없으므로 선반, 소파와 침대 틀, 대문 및 창문 등의 철제 제작을 외주 받아 학생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실습비를 굳히는 방식을 택했다. 따라서 현재의 수업 방식이 현실적이면서 대안적 모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학생들이 제대로 된 정규 교육받기보다는 각자 자기가 잘하는 것 위주의 역할만 맡다 보니 편향된 실습이 진행되었고, 수업이라는 명목하에 무임금 노동 착취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마음도 들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금지됐기 때문이다.
파견받기 전 이런 전반적인 사정을 알 수 없었고 한국에서 공부했던 커리큘럼대로라면 오로지 용접만을 가르쳐야 했지만, 이곳은 판금제관처럼 금속을 도면에 따라 절단 및 가공하거나 밴딩기를 이용해 각도에 따라 철제를 구부리는 기술이 많이 사용되므로, 약간 당혹스러우면서도 반면 참고할 지점도 분명 있었다.
밴딩 기술은 나름의 예술성을 부여하는데, 이는 ferronnerie d’art라는 영역으로 과거 유럽 및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었으므로, 쏘우와 상담을 통해 나의 수업에 대해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그는 학교에 재정이 튼튼했다면 나의 방식과 같은 실습을 운영했겠지만, 그렇게 못했던 것뿐이라며 오히려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자신이 교사일 때 그런 수업을 한 적 있다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부분과 할 수 없는 것을 나누고 특화된 용접 교육은 내가 담당하되, 나머지 부분은 동료 교사들이 나보다 유능했으므로 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현장에 가면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곤 하는데, 그때마다 상황에 맞게 대처할 수 있는 유연성이 늘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