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JT 기간
언어 교육이 종료되고 이후 1주일 동안 OJT 기간으로 임지에 내려가서 앞으로 2년간 활동할 기관을 방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때 미션은 크게 3가지로, ‘은행 계좌 개설’과 ‘파견 지역 및 거주지 조사’ 그리고 ‘기관 적응 및 담당업무 파악’이었다.
배정받은 임지는 수도에서 남쪽으로 약 2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은게혹Nguékhokh’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국내 교육 때부터 이곳이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지도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발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할 곳은 F.E.M.PFoyer d’Enseignement Moyen Pratique라는 기술훈련원이었고 용접 실습을 가르치는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기관에 갈 생각을 하니 떨리고 설레었다.
그런데 방문한 시기가 방학 시즌과 맞물리는 시점이라 학생들을 만나 볼 수 없었다. 그래도 그곳에서 일하는 기관장과 몇 명의 학교 관계자를 만날 수 있었다. 드디어 지난 5주간 갈고 닦은 프랑스어 실력을 뽐낼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자기소개쯤은 이젠 물구나무를 서서 속사포 랩을 하는 수준이었기에 자신감이 있었다. “Bonjour, Je m’appell Taesun. Je vien de la Corée de sud. Enchanté!(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태선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반가워요!)”
역시나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어르신께서 환히 웃으시며 대답을 해 주셨는데,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종족어로 한참 동안 축복과 대운을 빌어 주시는 것이었다! 이런 망했…
등줄기에 땀이 비 오듯이 쏟아져 내렸고 최대한 어색하지 않은 척 알아들었다는 시늉으로 OuiYes를 남발하였는데, 인생 최대 고비의 순간을 맞이했다. 정말이지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그런데도 좌절하지 않고 이들에게 다시 환심을 사기 위해 세네갈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전통차(아따야)를 직접 제조해 보였고, 되지도 않는 월로프어를 사용해가며 그들의 비유를 맞추며 온갖 정성을 다했다.
진심은 언제나 통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들도 충분히 내 노력에 감탄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하하하…
계좌 개설과 거주지를 알아보는 일은 기관장이었던 ‘쏘우Sow’가 많이 도와주었다. 계좌는 미리 준비한 직업증명서, 여권 사본, 수수료, 사진 3장과 함께 은게혹 정류장 근처에 있는 CMSCredit Mutuel du Senegal라는 은행에 방문하여 빠르게 개설할 수 있었다.
문제는 거주지를 알아보는 일이었고 생각보다 은게혹 마을 안에서 집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다. 학교 주변에 새로 지어지고 있는 빌라 형태의 집은 곧 완공될 거라 하였지만, 사실상 기약이 없어 보였다. 선배 단원이 사는 집은 앞으로 임기가 끝날 때까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이 또한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었다.
세네갈 사람들이 사는 일반 주택도 방문해 보았는데, 대가족 형태로 여럿이 함께 살다 보니, 집이 너무 커서 혼자 살기엔 관리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리고 기존 집들은 다 허름하고 곰팡냄새도 심하며 보안까지 매우 취약해 마음이 꺼려졌다. 이것저것 따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외국인이 살기에 좀 더 적합한 환경의 집이 필요했다.
그러다 마침 학교와 거리가 멀지 않은 어떤 단독 주택을 기관으로부터 소개받았다. 밖에서 집을 쳐다보는데, 예쁜 노란 외관이 한눈에 쏙 들어왔다. 대문을 여니 앞에 마당이 있었고 알록달록한 예쁜 꽃들과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집 구조는 두 층으로 나뉘어 1층엔 거실과 부엌 그리고 집주인 방이 있었고 2층엔 여러 객실이 있었다. 이 누추한 곳에 어떻게 이런 집이 있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새로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프랑스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감성 하우스’였던 것이었다!
결국 고민 끝에 집 전체를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2층에 화장실 딸린 방 하나와 1층 공용 거실과 부엌을 사용하는 조건으로 계약하게 되었다. 처음엔 봉사단원이 이런 집에서 살아도 될까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은게혹에 마땅한 집도 없거니와 코이카에서 지원해주는 주거비용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였기에 특별히 문제 될 건 없었다.
한국은 서울 집값도 장난 아니고 작은 원룸조차 얻으려 해도 아등바등 힘이 들지만, 해외 봉사를 가면 좀 더 넓은 내 집 마련의 꿈을 아주 잠시 이뤄볼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여,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도다!
근무했던 F.E.M.P 기술훈련원의 전공은 총 6개 학과로 기계, 목공, 요리, 용접, 전기, 의류로 구성되어 있었고 기본적으로 3년 과정의 커리큘럼이었다. 학생 수는 전체 200명, 연령층은 만 13~24세였고 현지 교사들은 약 30명 정도 근무하고 있었다.
이곳에 파견된 KOICA 단원은 나를 포함 총 두 명이었다. 앞에 선임 단원이 이미 전기 분야로 활동 중이었고 나는 용접 직종으로 새롭게 파견된 신규 단원이었다.
OJT 기간에 학과 시설과 장비 등을 점검했는데, 충격 그 자체였다. 건물은 캄보디아 유적지에 있을 법한 사원처럼 너무 낡아 있었고 지붕은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기계들도 엄청 오래되어 골동품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그동안 어떻게 실습했고 운영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전문대 재학 시절 하루에도 수십 개씩 용접봉을 사용하며 실습했는데, 여기선 상상할 수 없는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봉사단원의 역할이 이런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온 것이기에, 크게 불만 불평하지 않고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겠구나”하고 기회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두 달간의 현지적응훈련을 마치며 세네갈에 온 목적과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일하게 될 학교에서 현지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 정말 꿈을 실현할 때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