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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Sep 09. 2020

아프리카 잘 다녀오겠습니다

들어가는 글





가슴 뛰는 일을 만나다


스무 살이 되어 내게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호주 이민’이었다. 호주를 동경하는 마음은 결국 워홀로 이어졌고 큰 배낭과 함께 부푼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워홀’은 ‘워킹홀리데이’의 줄임 말로 일과 여행을 1년 동안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특별한 비자였다. 하지만 정작 호주에서의 삶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노예 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농장 일은 비가 올 때면 일거리가 없어 고정 수입을 만들기 어려웠고, 도시로 돌아와 한인들 밑에서 타일 데모도로 일할 때는 어느 정도 돈을 모을 수 있었지만 정말 온갖 생고생을 다 했다. 그해 호주의 노동법이 개정되면서 기술 이민의 길이 사실상 막히자, 나의 꿈도 물 건너가 버리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사회가 낙후된 제3세계의 이웃을 돕는 ‘NGO’라는 비전을 만나게 됐다. 풍요로운 삶을 꿈꿨지만, 호주를 다녀와서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사실 호주로 이민 가고 싶었던 동기는 그동안 입시에 치이고 대학 서열화라는 한국 사회의 모순을 타개하여, 보란 듯이 잘살아 보겠다는 열등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렇지만 이젠 더 이상 열등감을 좇느라 허덕이는 삶이 아니라, 소명감을 따르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내 생에 처음으로 가슴 뛰는 순간이었다.


NGO 일이라는 거창한 꿈을 꾸었지만, 실제로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 군대 문제도 있었기에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단지, 내가 보유한 능력은 전문대에서 취득한 용접 자격증과 호주에서 익힌 서툰 영어가 전부였다. 과거에 아는 형으로부터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라는 단체가 해외봉사단원을 파견하여 개도국과 기술협력을 통해 경제,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사실과 동시에 군 복무도 인정받을 수 있는 ‘국제협력요원제도’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 코이카 사이트에 접속했을 때 협력 요원 모집 요강에 기계, 전기, 컴퓨터, 태권도, 경영 등 대부분 4년제 학과의 전공자 위주로 뽑고 있어서 전문대 학생인 나에게 좀처럼 기회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한번 모집 요강을 확인해보니, 정말 놀랍게도 ‘용접 직종’이 새롭게 신설되어 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더니 딱 나를 두고 한 속담 같았다. 이미 합격자 발표가 나고 지나간 공고였으나 의미 있는 내용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고, 다음 해에 또 공석이 생길지 확실치 않으나, 졸업까지 남은 1년 동안 준비해보기로 마음먹게 된다.




나의 치명적인 단점


준비과정은 전혀 쉽지 않았다. 평소 좋지 않았던 허리를 검사 받으러 병원에 갔다가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X-ray와 MRI 결과 선천적인 허리질병으로 군대에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였다. 내 몸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군대에 갈 수 없는 정도라니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믿을 수 없었다.


병명은 ‘척추전방전위증’이었고 요추를 잡아주는 뼈가 결손 되어 척추가 앞으로 밀려 신경을 누르면서 생기는 구조적 결함이었다. 실제로 한 자세로 오래 앉아있거나 장시간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허리부터 다리까지 저려서 힘들었던 점을 고려하면 부정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호주에서 그동안 심한 육체노동과 같은 고된 일을 할 때마다 큰 통증을 호소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후에 재검에서 4급 공익 판정을 받으면서 현 상황을 직시하게 된다.


“과연 군대에 갈 수도 없는 이 몸으로 국내도 아닌 해외에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했다. 괜히 봉사하러 가서 민폐만 끼치는 건 아닌지 자신이 없었다. 한편으론 밖에 나가 생고생하느니 차라리 집에서 안정적으로 출퇴근하며 공익 근무를 하는 편이 낫지 않나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는 육체의 질병뿐 아니라 심리적 고통이 동반되어 많이 위축되고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육체의 고달픔은 해외에 다녀오는 동안 잠시뿐이겠지만, 여기서 길을 멈춘다면 마음의 상처로 남아 평생 후회할 거라고. 그래서 비록 내 육체가 빈약할지라도, 가슴 뛰게 하는 꿈만큼은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고민을 뒤로한 채 결과를 온전히 운명의 주사위에 맡기기로 결정한다.


우선은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추가로 용접산업기사와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또한 교수님의 요청으로 외부 기업체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야간 실습반의 실습 조교를 맡게 되면서 교육 실무를 익혔다. 그리고 봉사단원이 되면 행정업무를 할 것을 대비해 졸업작품 제작 시 보고서 워드 작성과 PPT 제작 및 발표를 담당하였다. 결국 1년 동안 용접 관련된 자격, 교육 실무, 행정 능력까지 두루 갖추며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




국제협력요원이 되기 위한 과정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으나, 용접 직종으로 실제 공석이 생기면서 코이카 국제협력요원으로 지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1년 전만 해도 확신할 수 없었고 준비하는 내내 불안과 마주하며 겨우겨우 이 자리까지 왔는데, 마치 하늘이 돕고 있는 것 같았다.


협력 요원이 되기 위해서 3차 전형을 모두 통과해야 했다. 1차는 서류전형, 2차는 영어, 전공, 논술 시험, 마지막 3차는 일반 면접과 인성 검사로 구성되었다. 이후엔 신체검사와 신용 조회를 통해 문제없을 시 최종 합격자가 된다.


그런데 웬걸? 최대 고비였던 2차 시험마저 비교적 쉽게 통과되더니, 결국 기적처럼 최종 합격 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앞으로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고 설레었다. 마침내 국제사회의 빈곤퇴치를 위해 힘쓰는 민간 외교관이 된 것이다.


복무 기간은 총 2년 6개월이었고 파견지역은 아프리카 세네갈이었다. 처음엔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동남아를 선호했지만 안타깝게도 선택지는 오로지 세네갈 한 국가밖에 없었다. 내 생애 아프리카라니 저 먼 이국땅 세네갈은 그렇게 내 운명이 되고야 만다.


이후 국내에서 일정으로 논산에서 군사훈련 4주와 코이카 ODA 교육원에서 합숙 교육 4주를 무사히 마쳤고, 인천공항에서 가족들에게 “군대 잘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 대신 “아프리카 잘 다녀올게요!”하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작별을 고했다. 


“안녕 한국!”




자소서 일부 발췌


1. 지원 동기는?

어렸을 때부터 해외봉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경험해 본적은 없지만 TV나 책으로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아프리카와 같은 제 3세계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삶의 희망도 없이 살아간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그들의 삶을 궁극적으로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연히 ‘한국국제협력단’에서 봉사단원을 매년 뽑아 해외로 파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코이카는 실질적으로 그 나라 사람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기술력과 땀의 가치를 전수한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가진 지식과 기술을 그 나라 사람들과 공유함으로써 삶의 질이 높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2.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뛰어나고 큰 업적을 세운 사람일지라도,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분명 그 사람 주변은 늘 싸늘할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이며,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은 나이, 성별, 인종과 언어의 장벽을 모두 뛰어넘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가 이번 국제협력봉사요원이 된다면 한국의 민간 외교관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잘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 2년 이상 파견되어 걱정되는 부분은?

현지적응과 생활하는 것에 있어서는 시간이 지나면 어느정도 해결되겠지만, 2년 동안 같이 지낼 학교 학생들과 주변 관계자들과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을지, 저의 지식과 기술이 그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이 정말 실질적으로 그들의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하고 희망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과 부담감이 큽니다. “나의 수업은 곧 그들의 삶의 질이다.”라고 생각하기에 제 어깨가 그만큼 무겁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진심은 통한다는 말처럼 그들에게 진실 되게 마음을 다한다면 분명 놀라운 역사가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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