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밥은 가족을 키우지만

by 물고기자리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라는 영화에는 내 친구를 꼭 닮은 베트남계 미국인 배우, 라나 콘도르가 한국계 미국인 역으로 나온다. 주인공의 엄마는 한국인, 아빠는 미국인으로 이 영화에서 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설정된 엄마는 과거 회상 신에서 김치찌개를 끓이는 모습으로 잠깐 등장한다. 그런데 이 엄마가 김치찌개를 끓이는 모습이 내 눈에는 꽤나 인상적으로 보였다. 파를 가위로 숭덩숭덩 잘라 아무렇지 않게 집어던졌던 것! 언젠가 《집밥 인 뉴욕》에서 봤던 글이 생각났다. “요리책에 다진 파를 넣으랄 때, 나는 냄비 위에서 손으로 툭툭 끊어 넣거나 심지어 통째로 던져 넣기도 한다." 그때만 해도 그건 좀 게으르지 않나 했는데 그 모습을 실제로 보고 나니 이렇게 쿨내 날 수가.


한식은 확실히 손이 많이 간다.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을 어떻게든 줄이고 싶은 나는 그래서인지 부엌에 들어가면 몸보다 마음이 바빠진다. 갈수록 심해지는 아이의 반찬투정에 조금이라도 엄마답게 대응하려면 뭔가 새로운 것을 자꾸 해다 바쳐야 하는데 그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첫째 아이는 종종 우리 쪽의 반찬 가짓수를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 아빠는 먹을 거 많다. 우리는 없는데.”


속으로 뜨끔한다. 나는 신랑과 나의 식사를 우선으로 차리기 때문이다. 부모가 잘 먹고 힘을 내야 아이들도 돌보는 법이므로 나는 우리가 먹고 싶은 음식 위주로 식사를 차린다.


“그럼 빨리 커서 너희도 매운 거 먹던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일은 아이들 반찬을 조금 더 만들어야지, 혼자만 다짐한다.



삼시세끼 식탁을 차리는 일은 썰고 볶고 굽고 삶고 찌는 육체노동이자 영양을 고려한 식단을 구성하되 매끼 메뉴가 겹치지 않도록 창의력까지 발휘해야 하는 치열한 두뇌싸움이다. 가끔 생각한다. 엄마는 어떻게 그토록 오랜 세월, 가족을 위해 상을 차렸을까. 당연한 일이 아니건만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을 거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했던 때도 아닌데 엄마는 어떻게 매 끼 새로운 식사를 준비했을까. 엄마가 되어 가족을 위한 식탁을 차려내야 하는 입장이 되어서야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내가 회사를 다닐 때까지도 따뜻한 찌개를 늘 아침상에 올렸던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련해진다. 해도 뜨지 않은 어두컴컴한 새벽, 내 아침밥을 차린다고 부엌을 서성이는 엄마의 실루엣. 그 안에는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 했던 철부지 딸의 모습도 있다.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 안에서, 엄마의 따뜻한 밥상 속에서 밥심을 쌓은 덕분에 내가 머나먼 타지에서 이렇게 또 누군가를 어설프게나마 먹이며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루 세끼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나이가 되면, 내가 지어 내가 먹는 집밥이 커다란 유산임을 알게 될 것이다. 수백 번 수천 번 우리에게 밥을 지어 먹인 엄마가 전해준 것이었다(《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바다처럼 짰다》, 고수리).”


진밥이 되어버린 오늘 저녁밥을 보니 몇 년 전 전기밥솥으로 둘째 아이의 진밥에 가까운 죽을 만들던 저녁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처음 맛보는 순간의 경이와 환희가 고스란히 떠오른 얼굴. 새로운 음식을 탐하는 둘째 아이의 표정 위에 첫째 아이가 수박을 처음 먹었던 날의 기억이 겹쳐진 날이었다. 엄마가 밥상을 차리는 건 아이들의 그 표정을 잊지 못해서가 아닐까. 물론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은 떡볶이를 해줘도 예전의 나처럼 고기나 야채는 쏙 빼고 떡만 골라 먹지만.


나는 분명 엄마처럼 그렇게 화려한 밥상을 내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지나친 희생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꽁꽁 숨어 있는 불합리한 상황은 거부하고 싶다. 엄마가 자신의 시간을 위해 기지개를 켜지도 못할 정도로 밥이라는 대상에 목을 매는 문화는 우리집에 절대로 들이지 않겠다.


바라건대 그저 가족 모두가 따뜻한 밥상을 둘러싸고 앉아 든든한 여러 끼를 먹었다고, 아이들의 기억 언저리에 그런 잔상이라도 남으면 그걸로 족하겠다. 단품 요리가 올라오는 날이 더 많은 식탁일지언정 감사하는 마음만은 잊지 않기를. 대체로 맛있게 먹어주며 엄지 척을 들어 올리는 아이들의 오물거리는 고 자그마하고 야무진 입을 보기 위해 나는 오늘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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