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악! 엄마!”
나의 괴성에 놀란 엄마가 둘째 아이를 안은 채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내 앞에는 세 살 된 딸아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동안 크게 아픈 적 없고 평소 감기조차 거의 걸리지 않던 아이였다. 외출 후 돌아와 열이 나기 시작한 아이는 함께 씻고 낮잠을 자자는 내 말에 옷을 벗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샤워부스에 들어가자마자 다리가 푹 꺾이더니 그대로 쓰러졌고 연이어 몸이 뻣뻣해지며 흰자위가 희번덕였다.
둘째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터라 다행히 산후조리 차 엄마가 와 계셨다. 아이의 뻣뻣한 팔다리를 주무르고는 있었지만 엄마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물을 좀 먹여보려 했지만 아이의 굳은 입과 목은 물을 거부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발작 중에는 아무것도 먹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벌거벗은 채로 벌거벗은 아이를 부둥켜안고 목이 찢어져라 울부짖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괴성만 내뱉었다. 아이가 이대로 내가 모르는 곳으로 가버리면 어쩌지,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도 못 하고 안아주지도 못하게 되면 어쩌지 정말이지 겁이 났다. 그 순간이 지속된다면 더 이상 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나중에 엄마는 그날 손녀딸보다도 자신의 딸인 내가 어떻게 될까 봐 놀란 가슴을 움켜쥐었다고 했다.
엄마가 없었으면 그 순간을 어떻게 버텼을지 몇 번을 돌려 감기 해봐도 까마득해질 뿐이다. 신랑에게 전화를 건 사람도 엄마였고 내 안중에 없던 둘째를 내내 안고 있던 사람도 엄마였다. 발만 동동 구르던 나 대신 아이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나에게 수건을 둘러준 사람도.
2, 3분 정도 지났을까 다행히 아이의 눈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더니 경직되었던 사지가 풀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엉엉 울기만 했다. 나도 아이를 안은 채 엉엉 울었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은 뒤 회사에서 급히 도착한 신랑과 함께 응급실을 찾았다. 응급실은 처음이라 긴장되었다. 의사가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듣지 못하면 어쩌나,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기다림이 길어지자 우리만 이렇게 기다리는 건 아닌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뾰족해지기도 했다.
열성 경련이라는 진단명을 들었다. 열이 얼마나 심하면 사람이 발작을 일으킬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응급실 담당의는 나름 열을 다해 설명해 주었다. 그 설명을 듣고도 속 시원히 이해되지 않아 기다리는 동안 내 나라 말로 검색을 해보았다. 아이들을 그럴 수 있다고 큰 문제 아니라는 말을 여러 블로그 글을 통해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아이의 상태가 확실히 괜찮아질 때까지 병원에 있어야 한다기에 침대에 눕힌 채 나도 그 옆에 앉았다. 아이는 집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으며 천장에 매달린 병원 TV를 보았다. 히죽 웃는 걸 봐서 괜찮아 보였다. 손등에는 간호사에게 받은 칭찬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수시로 들어와 아이의 상태를 체크한 의사는 재발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나이 때만 지나면 괜찮다고. 4시간 후 아이는 퇴원했고 그 후 4년째 재발은 없다.
그날 엄마가 없었으면 갓난아이를 데리고 다 같이 응급실에 갈 수나 있었을까, 신랑이 집에 올 때까지 나는 어떻게 버텼을까, 아니 그 상태에서 신랑에게 전화나 걸 수 있었을까, 해외생활에서 미처 생각 못했던 일이 속수무책으로 일어나자 겁이 났다. 당당하게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던 나, 새로운 동네로의 이사를 앞장서서 감행하던 나는 사라지고 한없이 쪼그라든 나만 남았다. 그동안 내가 보인 용기는 진짜 용기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엄마였기에, 나에게는 이제 두 아이가 있었기에 주저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음번에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또 다른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미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진짜로 또 다른 사고가 일어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