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례자다:)
(feat.혼자여서 좋은 점)

190428 Day27. 포르토마린 - 팔라스 데 레이 25km

by YEON

오늘도 날씨가 참 좋았다. 그리고 점점 더워지고 있다. 해가 올라가는 9시-10시부터는 땀이 나기 시작해, 겉옷은 일찍이 벗어 허리에 두르고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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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아에서부터는 정말 혼자가 되었다. 그동안에는 며칠 쉬더라도, 누군가 아는 사람이 한 명은 꼭 있었고 그와 함께 걸을 수 있었다. 며칠 못 만났던 사람들도 길을 걷다 보면 다시 만나고는 했다. 근데 이번에는 버스를 타고 사리아까지, 조금 긴 구간을 점프했기 때문에 나와 함께 걷던 사람들은 모두 내 뒤에 걷고 있었다. 길에는 모두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뿐이었고, 사리아부터는 이미 형성된 무리들도 많았기에 누군가를 새로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또한 나도 굳이 누군가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혼자인 것도 좋았다. 이제 정말 나만의 시간이라는 생각에. 마지막 5일은 혼자 걸어보자는 생각도 컸다. 사실 누군가와 걷게 되더라도, 앞서 함께 걷던 친구들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새로운 사람과 함께 걸을 바에야 차라리 혼자서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었다. 그동안 함께 길을 걸었던 사람이 아니라면.. 함께 산티아고에 도착한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이전 친구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다시 걷게 된다면, 그저 외로워서라는 이유가 클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혼자 다니게 되면서 외롭기도 했지만, 좋은 점도 많았다. 사리아부터는 숙소에서 아침을 먹지 않고 일찍 출발했다. 누군가를 기다릴 필요도 없으니 내가 눈이 떠지면 준비해서 씻고 나가면 됐다. 그러다 보니 숙소에 도착하는 시간도 많이 빨라졌고, 쉴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났다. 일찍 출발해 걷다가 배고플즈음에 눈에 보이는 바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걷다가 쉬고 싶을 때 쉬고, 마시고 싶은 것을 마셨다. 혼자였으니까.

2019-04-28-12-39-32.jpg "까냐, 뽀르빠보르!"

특히 중간에 쉴 때 마시는, 오전 10시부터ㅋㅋㅋ 마시는 맥주 한잔이란, 캬!

다른 사람들과 걸을 때에는 맥주를 자주 마시지는 않았는데, 혼자 걷다 보니 처음에는 외로워서. 그리고 나중에는 한잔씩 마시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계속 마시게 되었다. 기분이 좋아 발걸음이 빨라진 건지, 술기운에 빨라지는 건지. 덕분에 속도도 빨라지고 말이다.

아마 혼자여서 더 마실 수 있었던 것도 있었다. 일행들과 함께면 오전부터 술을 마시냐는 이야기ㅋㅋ에 조금 망설이거나 눈치를 보며 마시지 않기도 했고, 맥주를 마시는 만큼 화장실을 자주 가야 하기에 망설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혼자이기에, 내가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쉬고 싶으면 쉴 수 있었다. 정말 누구의 신경도 쓰지 않고 나의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걸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일행은 아니더라도 하루에 몇 번씩 계속 만나 얼굴이 익숙해진 외국인 친구들이 나에게 대단하다고 엄지를 세워주고는 했다. 어려 보이는 동양 여자아이가 혼자 순례길에 와서 시간이 나면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ㅋㅋㅋ


이건 여담인데... 처음 순례길을 올 때에 영어를 잘하지는 못해 많이 걱정했었다. 그래도 다양한 외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순례길이니 간단한 생활영어 정도는 통하겠지? 하고 큰 걱정 없이 온 순례길이었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은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 특히 작은 마을에 있는 바는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운영하시는 곳이 대부분인데, 그런 분들은 전혀 영어를 하시지 못한다. '아,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하시지 않겠어?'라는 나의 생각을 갔다 버리라고 할 정도로 "오렌지 주스"도 못 알아들으셨다. 아니... 지금 생각해도 당황스럽다. 오렌지 주스는 고유명사 아닌가? :(

그래서 [오렌지 주스 = 수모 데 나랑하, 까냐 = 생맥주, 쎄르베싸 = 맥주] 이 세 단어는 필수 생존 단어로 외워서 다녔다. 뽀르빠보르 = 부탁합니다, 와 함께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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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도 팔라스 데 레이에 도착해 혼자 뿔뽀와 맥주를 마셨다. 이 곳 레스토랑에서도 혼자서 뿔뽀에 맥주를 마시는 나를 더 챙겨주려는 웨이터 덕분에 조금 민망했지만, 정말 맛있었고 즐거웠다!

나는 순례자가 아니라 '술'례자다!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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