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입니다만

week 14. 230507

by 옥돌

니야마의 마지막 계율 이스바라 프라니다나입니다.


'이스바라'는 최선의 주인이란 의미로, ‘신’, ‘진정한 자아’ 혹은 ‘불변의 현실’로도 번역됩니다. ‘프라니다나’는 ‘몰입’, ‘집중’, ‘헌신’을 뜻합니다. 이 두 요소를 합쳐서, 요가수트라에서는 ‘신에게 귀의한다’라고 설명하는데요.


저는 “온전한 자신이 되기 위한 진정한 자아의 몰입”으로 해석했습니다.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저는 무교입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견해임을 밝힙니다.



중학생 때 독실한 기독교인 친구를 부러워했다. 힘들 때나 슬플 때, 의심할 여지없이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 사실. 굳게 믿는 무언가를 가진 그 친구가 참 단단해 보였다.

스무 살 한창, 신과 종교에 관심이 많았다. 혼자 서울에 올라와서 의지할 곳이 필요했나 보다. 실제로 종교를 한번 가져볼까? 싶기도 했다. 그러다 ‘신’이 도대체 뭘까 궁금해졌다.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인데, 이것을 믿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하면서.


종교를 가진 이들과 아닌 이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대화했다. 그렇게 정리하게 된 신을 바라보는 나의 ‘관’.

누구에게나 신은 있다.


종교가 아니라도 굳게 믿는 어떤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신’ 아닐까. 가족이나 친한 친구, 또는 본인이 속한 집단도 신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믿음을 주고받는 대상이 있기에 살아가는 존재이니까.

건강한 방향으로 그 대상을 믿고 의지한다면 너무나 좋겠지만, 특정 집단을 배척하고 편협한 사고를 강요하는 불건전한 대상(사이비 종교,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빠진다면 그 신은 없느니만 못하다.. 는 생각도 덧붙인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신이 있었다.


학창 시절 나의 신은 부모님이었다. 공감이 필요할 때면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힘듦을 토로했고, 지식 또는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는 아빠한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했다. 몸은 멀리 있어도 언제나 마음 곁 든든히 있어주신 부모님 덕분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어무니 아부지 감사합니다)

종교가 있는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종교든 무엇이든 내 안에 믿는 대상을 만들어 내 안의 신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가 없더라도 내 안의 ‘무엇’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 역시 신에 귀의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본다.

나 역시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혼자 두 발로 일어설 수 있는 강인한 존재”임을 몸소 깨달았다. 내 안에 스스로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크고 단단한 나 자신이 있다고 믿게 된 그 순간, 나는 신을 믿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와 무관하게 자기 내면에 신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주체적인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혹자는 종교를 믿는 것이 다른 무언가에 삶을 위탁하는 수동적인 행위라고 말하는데, 이에 반하는 입장이다.

외부가 아닌 내부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할 수 있는 힘. 그 힘은 절대적이거나 정적인 형태는 아닐 것이다. 마치 자존감처럼, 언젠가는 온전한 것처럼 느껴졌다가 한없이 쪼그라드는 날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쉬이 회복하여 다시 온전한 나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해 꾸준한 수련을 이어가는 게 아닐까.

사실 어제 요가원에서 최종 시연 수업을 하고 실컷 자책의 시간을 보냈다. 너무 부담을 가졌는지 준비한 것의 반도 못 꺼낸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침대에 엎어져 있다가, 다시 일어나서 “어차피 앞으로 쭉 수업을 하고, 안내를 할 텐데, 고작 오늘 하루로 이렇게 단념할 수는 없지! 이건 과정일 뿐이야!”하는 마음으로 인스타그램에 다음 수업 일정을 공지했다. 계속 실수하더라도, 나를 수련과 수업에 내던지며 경험을 쌓아가야지.

내 안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크고 단단한 존재가 자리하고 있음을 믿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