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의 명화' 아시나요? 아시는 분이라면 연배를 가늠해 볼 수 있을듯 합니다. 저는 얼마전부터 '주말의 소설'을 시작했습니다. 소설은 인문서에 비해 호흡이 길기도 하고 소설 내용에 따라 감정선이 연장되는 경우가 있기에 소설은 주말에 읽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김초엽 작가님의 <지구 끝의 온실>을 읽게 되었는데 오늘 그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김초엽 작가님의 소설은 지인이 작가님을 좋아하는 덕분에 읽게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김초엽 작가님에 대한 사전정보없이 그저 우리나라 젊은 작가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소설 내용은 더더욱 알지 못했고 말입니다. 그래서 <지구 끝의 온실>을 보고서야 김초엽 작가님이 주로 SF소설을 쓰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포항공대에서 화학을 전공하시고 생화학으로 석사까지 마치신 인재였다는 것이 소설을 보고 나면 수긍이 됩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소재와 배경에 대한 지식이 아니고는 쓸 수 없는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생소한 부분이기에 소설의 몰입도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김영하 작가님의 <작별인사>가 떠올랐습니다. 작별인사의 연장선같은 기분도 들었고 말입니다. 작별인사에서 처음 접하게 된 미래사회가 지구 끝의 온실을 통해 조금 더 구체화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작별인사에서 막연하게 미래사회를 엿보았다면 그 미래사회가 현실로 그려진 건 지구 끝의 온실이었답니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도 사람의 본성은 여전하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어느 누구도 이타적일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이타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생존하고자 하고 생존해야 만 하는 상황 속에서 타인에 대한 동정이자 공감의 감정은 터부시 될 뿐입니다. 오히려 타인을 위하는 사람이 미련하게만 비춰질 뿐입니다.
아직은 상상속에 불가하지만 미래 사회에는 인간 대 인간뿐 아닌 인간 대 기계와의 대립도 불거질테니 생존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적이 더 생겼다고 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식물마저도 생존의 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등장하기도 하니 미래시대에는 인간이 생존하기 더 어려운 구조라고나 할까요?
소설 속 많은 인물들은 저마다 생존의 위협을 떠안고 있습니다.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누군가를 믿고 의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 여기다가도 배신의 끝을 경험하게 되는 인물들을 보며 오히려 당하는 사람이 아쉬울 정도이기도 합니다.
'자기 위치에 따라 좋은 사람인 척할 뿐'이라는 말은 어쩌면 인간 본성이지 싶습니다. 내 위치의 안정과 불안정에 따라 관계의 패턴 양상이 상이한건 진리에 가깝습니다. 다만 그걸 당연시 여기는 사람과 일말의 양심이나 확고한 도덕적 기준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죄책감을 가지며 고민은 할 수 있지만 그 역시 생존 앞에서 완고한 도덕적 잣대는 그저 편협해 보일 뿐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코로나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 인해 두려움에 떨던 기억이 여전하니깐요. 코로나에 대한 내성이 있어 안전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안전함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보다는 불안에 조금 더해진 희망이었다고 할까요?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모든 현실이 딱 코로나가 극심했던 그 때를 이야기하는 거 같아 그런면에서 공감이 되기도 한 소설이었습니다.
소설 중후반쯤 지수와 레이첼에 대한 서술은 소설 전체 맥락을 바꾸어 버립니다. 생존을 위한 여정인가 싶다가 갑자기 지수와 로봇인간이라 할 수 있는 레이첼에 서사는 흐름을 깨기도 합니다. 결국 지구 끝의 온실을 만들어내고 지켜낸 레이첼의 이야기는 분명 개연성이 있지만 그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데 있어서 인간과 로봇인간 사이의 감정선은 소설 전체 흐름을 방해하는 기분마저도 들며 마지막장까지 읽은 후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거지 독자로서 의아함은 감출 수 없었습니다.
더스트라는 위협으로부터 인간을 구해줄 레이첼에게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혹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 지수는 레이첼에게 어느새 감정을 품기 시작합니다. 그 감정이 자신의 것만이 아닌 지수가 바라보는 대상인 레이첼에게 공감되기 위해 로봇을 정비하는 지수는 레이철을 수리하며 조정하기도 합니다.
지수의 조정에 의해 레이첼이 지수에 대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인지 애초부터 지수와 레이첼은 서로 계약 조건 그 이상의 감정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통해 느꼈던 건지는 모를 일입니다. 레이첼이 기계라는 것에 한계점을 둔다면 지수의 인간적인 욕심은 그저 욕심에 그칠 뿐이지만 기계이지만 생존을 위해 함께 한 시간으로 인해 서로에게 존재감이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생각할 수 있는 여지인듯 합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고 생존과 관계라는 주제로 삼았습니다. 생존에 있어 이기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 생존을 함께 해쳐나가는 타인에 대한 존재는 생존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 사람이 감정을 가진 종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생존이라는 동물적 감각만이 가진 사람이 미래 사회에서 가장 강한 자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동물적 감각만 가지고 살아간다면 말이지요. 그 감각으로 인해 생존을 한들 마음을 서로 주고 받을 또 다른 생존자가 없다면 그 생존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점점 사람의 쓸모를 대신할 것들로 사람의 쓸모를 다 채우고 남지만 과연 사람의 쓸모를 기계에게 일임한 사람이 해야하는 것 혹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기계 발달로 인한 사람과의 쓸모는 일임할 지언정 사람과 사람사이에 맺는 감정마저 기계에게 쓸모를 넘긴다면 사람에게 결국 남는 건 동물적 감각만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래사회라고 한들 구석기 시대와 다를바 없는 시대가 도래하는 것은 아닐까요?
곧 김초엽 작가님의 소설을 한권 더 읽게 될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