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바깥은 여름》, <노찬성과 에반>

너와 나, 서로를 위하는 마음

by 문영

가끔 생각한다. 인간은 왜 이렇게 외로운 존재로 태어났을까. 왜 이렇게 홀로 서질 못하는가.

고독은 남녀불문으로 느끼는 감정으로 인간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김애란 작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고독(孤獨)은 한자 그 자체도 기가 막힌다. ‘외로울 고孤’에 ‘홀로 독獨’이다.


「노찬성과 에반」은 차라리 「고독」이라 해도 되겠다. ‘고독’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2. 부모 없는 어린아이와 자식 없는 늙은이(네이버 사전, 2023)”라고 나온다. 「노찬성과 에반」의 등장인물 전부이다. 부모 없는 어린아이와 자식 없는 늙은이. 아, 그리고 에반.


찬성은 아픔이 뭔지 모른다. 그러나 아빠를 죽음으로 이별하였으니 죽음이 뭔지는 알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겪으면 일찍 철이 든다. 어쩌면 철이 든다는 것은, 아픔을 감내한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찬성은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어린이였다. 세상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다. 홀로 걷는 길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혼자라는 사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남과 다른 삶의 패턴은 괜찮았을까. 마치 실존 인물을 마주하듯이 나는 찬성이에게 몰입했다.


찬성이 나이였을 때 나는, 상대적 빈곤을 느꼈었더랬다. 옷차림이, 집의 크기와 위치, 모양이 남과 달랐다. 빌라 계단을 내려가야 우리 집은 나왔다. 우리 가족은 단칸방을 탈출하여 방 두 개짜리 반지하로 이사 와서 성대한 집들이를 했었다. 그때 모인 친척들이 어둡지 않다고, 햇빛이 든다고, 이 정도면 거의 일 층이나 다름없다고 축하인지 위로인지를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친구는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우와 너희 부모님 돈 많이 버셨구나! 축하해!”라고 해 주었는데, 그 친구네 집은 30평대 아파트였다. 가난이 불편하거나 부끄럽지는 않았다. 아니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더랬다. 어렸었고,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게 없었으니까. 그러나, 남과 다르다는 게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입고 다니는 옷이 친구들의 것과 다른데 도대체 왜 다른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깨달았다. 친구들은 모두 백화점 브랜드 옷을 입고 있었다는 걸. 나는 동대문, 남대문 시장의 옷을 입고 살았었다. 부촌에서 부자가 아닌 삶은 무언가 어색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원하는 모든 것을 먹고 가질 수 있었다. 부모님은 가난했지만, 우리 남매는 가난하지 않았다. 금세 지상으로 올라왔고 금세 내 방이 생겼으며 금세 남부럽지 않은 용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환경이 일찍 나를 철들게 하였고 그에 따라 내가 원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우리 집 형편에 맞춰져서, 친구들만큼의 것을 바라지는 못했다.


찬성이도 그러했을 것이다. 남과 다르다는 데서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고독했을까. 가족이라곤 할머니뿐이었는데, 생계에 지친 어르신은 어린 손자에게 절대 따뜻하고 희망적인 이야길 해 주지 않는다. 생계에 지치면 그럴 수밖에 없다. 미안함도 육신의 고통에서는 힘을 내지 못한다. 일찌감치 포기를 내면화한 아이는 방과 후에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다가 절친을 얻는데, 바로 버려진 노견이었다. 마음을 나누는 존재. 그런 존재가 친구이다. 아이와 강아지의 우정이 마음 먹먹하게 그려졌다.


서로에게 마음을 주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싶은 그 가련한 우정이 시리면서 따뜻했다. 찬성이가 아픈 에반을 데리고 동물병원에 가서 가진 돈만큼 검사해 달라고 하는 것과 의사의 권유로 에반의 안락사를 결심하는 것에는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죽음으로 이별한다는 게 어떤 건지 너무도 잘 아는 아이가 에반의 아픔을 끝내주겠다고 안락사를 마음먹고 돈을 벌기 시작한다. 안 봐도 뻔한 그 작은 체구로,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전단을 돌리고 돈을 벌었는데, 마침내 돈이 있음으로써 얻는 여러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에반, 조금만 버텨 줘. 용돈 받고 편안하게 해 줄게.’ 목표한 돈을 다 벌고 그것을 찔끔찔끔 꺼내 쓰는 찬성의 속마음이 너무 잘 이해됐는데 그렇게라도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는 찬성이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결국 에반도 찬성을 위한 행동을 했으리라. 결말은 내게 짙은 여운을 주었다. 우리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할 때 사고능력을 기준으로 삼을 때가 있다. 인간은 이성이 있고 동물은 그러하지 않다고 왕왕 들어 왔다. 그런데 진짜, 동물은 이성이 없는가. 까마귀가 죽은 친구나 가족 까마귀 둘레에 빙 둘러서 마치 애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거나, 고양이가 아픈 새끼를 물고 인간의 병원 응급실에 나타난 일이 전해지는 걸 보면 동물도 사고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다. 다만 말을 못 하고 물론 인간의 능력치를 따라오질 못할 뿐. 에반도 그러했을 것이다. 자기가 저 어린 주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내내 고민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고독을 보듬어 준 친구였기 때문이다.


찬성이가 너무 슬프지 않길 바랐다. 제발 반듯하게 크면서 형편이 나아지는 걸 경험하길 바랐다. 세상이 춥지만은 않다는 걸 느꼈으면 했다. 자루를 열어보지 못하는 찬성의 마음을 너무나 알겠어서, 잘했다 칭찬해 주고 싶었다. 열지 마. 때로는 모른 채 넘어가는 것도 방법이야. 얼른 돌아가서 차라리 크게 울렴. 그러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아직도 세상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고독한 어린이가 너무도 많다. 내가 어렸을 때는 그래도 남과 달랐던 내가 괜찮았었다. 누군가는 동정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흉을 봤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걸로 인해 놀이에 끼지 못하거나 차별받지는 않았었다. 현재는 어떨까. 작품 속 찬성이도 따돌림을 받진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에반만이 찬성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개의 의리가 사람의 그것보다 낫나. 아니면 마음이 통하면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크면 상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가.


김애란은 「노찬성과 에반」을 통해 마음을 나누는 몇몇 양상을 보인다. 결코 따뜻하고 희망적인 말을 못 하는 할머니도 손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함을, 찬성이에겐 자주 함께하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지극함을, 그리고 서로를 위하는 그 지극한 에반과 찬성의 교류를 너무나 담담하게 그려냈다. 찬성의 이름은 왜 노찬성일까. 자꾸 생각해 보게 되어서 느낌적으론 알겠는데 설명을 못 하겠다.


재밌는 건, 이 작품을 읽고 난 후, 오가다 만나는 많은 반려견이 참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타자와 마음을 나눌 때, 이 각박하고 차가운 세상이 좀 따뜻해지지 않을까. 작가는 그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내 마음 한 평 이상을 타인에게 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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