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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n 11. 2023

사람도 건물도 없는 도시의 한복판

집 근처 미술관을 따라 올라가면 난데없이 숲이 펼쳐진다. 단단한 쇠로 내 허리쯤 오는 높이의 울타리가 쳐져 있고, 그 바로 아래로는 내 키의 몇 배는 되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다. 이쪽 절벽은 숲과 도로를, 위쪽의 절벽은 숲과 주택가를 구획한다. 여기서는 건물도 보이지 않고, 오직 초록뿐이다. 울타리를 넘으면 들어갈 수 있지만, 누구도 감히 그럴 엄두는 낼 수 없는 숲. 서울 한복판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우리 가족은 봄마다 이곳에 자주 간다. 우리는 마음대로 이곳에 ‘아카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카시아 나무가 많다는 이유다. 아카시아 꽃이 거의 다 진 오늘도 그곳에는 달달한 향기가 가득했다.


청와대가 가까운 이 동네는 안보상의 이유로 개발이 제한되어 있다. 어떤 주민들은 대통령 집무실이 용산으로 이동한 지금이 기회라며 개발 제한을 풀자고 하기도 하지만, 아직 이 동네의 건물들은 대체로 키가 작다. 그래서인지 간혹 비어 있는 땅들이 보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숲의 위치와 모양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위치로 보건대 이곳은 주택가로 개발되기 전에 북한산의 어귀나 자락이었을 것이다. 주변 지형으로 추정해 보면, 이 인근은 고도가 낮은 편이었지만 다른 쪽에서 이어지는 도로와 부드럽게 연결하기 위해 콘크리트를 쏟아부었을 테다. 아마 아카숲은 주택가 개발 과정에서 비용의 문제로 인해 그대로 남겨진, 사람의 기준에서 ‘공터’일 것이다.


하지만 건물 혹은 사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을 뿐, 그곳에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다. 아카숲에 갈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발에는 말라서 떨어진 아카시아 꽃잎들이 바삭하게 밟힌다. 꽃잎들은 바람을 타고 우리를 향해 하늘하늘 날아온다. 울타리와 턱을 타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흘린 부스러기를 집어먹는 개미들은 언제나 분주하다. 울타리를 따라 부지런히도 자라나 있는 괴불주머니의 노란 꽃들은 한참 동안 튼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너머에는 아카시아 외에 이름 모를 수많은 나무들과 풀들이 가득하다. 절벽부터 나무줄기까지 이곳의 모든 걸 덮은 듯한 담쟁이덩굴과 함께.


여기서 사람은 쓰레기의 형태로 흔적을 남긴다. 사람 손바닥만큼, 혹은 그보다 크게 펼친 담쟁이덩굴의 잎 위에 놓여 있는 커피 캔들, 누군가가 신나게 먹고 쏟아서 버린 듯한 조개껍데기 한 무더기, 대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를 알록달록한 캐리어, ……. 이곳을 누군가의 집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쓰레기를 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들과 곤충들이 살아가는 장소를 그들의 집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레몬나무 화분에 거미가 살고, 바질 화분에 개미와 지네가 산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물을 주거나 흙을 섞어주기 전에 우리 가족은 한 번씩 화분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를 공연히 해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개발의 와중에 ‘버려진’ 이곳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도 경계를 존중해야 하는 삶의 장소로 이해한다면, 도시 안에서도 우리는 서로 얽혀들며 살아가는 다양한 종들의 크고 작은 앙상블들을 마주하게 된다. 도시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감수성은 작고 느린 존재들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공간을 다시 보는 일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공터, 아니, 아카숲에서 배운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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