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학교 도서관에서 정문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처음부터 큰길로 가거나, 좁은 길을 지나서 큰길로 들어가거나. 나는 거의 후자를 택하는 편이다. 그 길을 지날 때 언제나 마음속으로 인사하는 나무 한 그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나오는 길에 나는 그 나무를 볼 수 없었다.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아주 매끈하게 잔디가 깔려 있었다.
내가 도서관을 지날 때마다 이 나무 앞으로 다닌 데에는 작은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 나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정말로 씨앗이 막 싹이 났을 때부터 봐왔다. 소나무였다. 나와 아버지가 집에서 소나무를 키워보려고 씨앗을 주워 왔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소나무의 새싹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안다. 우리가 싹을 틔운 소나무는 여덟 개 정도의 아주 가느다란 잎을 펼쳤다. 학교에서 본 새싹도 딱 그런 모양이었다.
그곳에는 나지막한 소나무와 향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무가 하나둘씩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 근처에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그러나 사실 사용하는 사람은 여전히 극소수인) 공간을 마련하면서, 그 공간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는 추정되는 이유조차 없다. 그렇게 나무들은 모조리 잘려 나갔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바로 그 새싹이었다. 나무들을 자를 때는 너무 작아서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소나무 싹을 틔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데, 그 녀석은 학교 한복판에 떨어져서 나무가 되었다. 새끼손가락만 하던 작은 초록빛 새싹은 자라서 갈색으로 목질화되고, 작은 화분에 쏙 들어갈 만한 크기의 소나무가 되었다가, 결국에는 신경 써서 찾지 않아도 보이는 나무가 되었다. 특별히 신경 써서 관리하는 사람도 없었을 텐데 그렇게 자란 게 기특했다. 아니, 사람이 안 끼어들어서 그만큼 자랐을까.
그렇게 그 녀석은 나무들이 다 잘려 나가고 잔디만 보송보송 남아 있는 공간의 정중앙에 당당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나무의 키가 어느 정도 컸을 때부터 나는 항상 불안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공간의 규칙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는 나무는 거침없이 잘라버리기 때문이다. 나무를 모두 정리한 것만 봐도 관리 주체인 학교의 입장에서 그곳은 잔디의 공간이지 소나무의 공간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그 나무의 죽음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나무는 밑동조차 남지 않았다. 마치 한 번도 나무가 없었던 땅처럼 잔디가 무성했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그곳에 수많은 씨앗 중 혼자 싹을 틔우고 완연한 나무로 성장한 소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균일하게 관리된 잔디 아래에 그 나무의 뿌리가 된 씨앗을 떨어뜨린 또 다른 소나무가 뿌리를 내렸었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인사하고, 괜히 앞을 지나다니며 안부를 묻는 나무가 생긴다는 것은 매끈한 잔디에서 사라진 나무를 기억한다는 의미다. 기억이란 자주 구차하고 미련하게 느껴진다. ‘아닐 미(未)’와 ‘익힐 련(練)’이 합쳐진 ‘미련’이라는 말의 의미처럼, 기억이란 무엇에 익숙해지기보다 무엇에 익숙해지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공간에 미련을 묻히는 일, 나는 그것이 도시 안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보존하는 첫 단추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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