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작은 마음들을 모아
안부인사를 하지 않을걸 그랬다
며칠 전 존경하는 은사 선생님께 안부 전화를 걸었다 되려 뜻밖의 비보를 전해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전립선 암’이라는 소식이 그의 육신에 고통을 주었다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살짝 떨리는 스승님의 목소리는 나의 가슴에 통증을 주었다.
얼마 전 나 역시도 신장에 이상이 생겨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동네 자그마한 병원에서 환자가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소리는 “큰 병원으로 가보세요”이다.
언제나 건강만은 자부하며 살던 내게 상급 병원으로 가라는 의사 선생님의 차디찬 한 마디는, 한 겨울에 볼을 에리고 지나는 겨울바람보다 더 날카로웠다.
몸이 아프면 누구나 마음이 약해진다
제 아무리 건강하고 우왁스러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몸이 제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감각하는 순간이 오면 삶의 태도가 움츠려 들 수밖에 없다. 샅바를 몇 백몇 천 번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천하장사라 할지라도 말이다.
행여나 주변에서 당신을 괴롭히는 완고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라. 세상 잡아먹을 듯 지겹도록 완고했던 그들의 마음들도 병이 있다는 소리에 스르르 녹아내릴 것이다.
내 주위엔 언제나 아픈 사람들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엔 늘 아픈 사람들뿐이었다. 주변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가족들 이야기다. 지금이야 신문을 잘 보지 않는 시대이지만, 아버지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지금의 메이저 신문사에서 한 지역에 지국장으로 세워서 보낼 만큼 실력이 출중한 분이셨다.
그러나 제 아무리 지성과 필력이 좋다 할지라도 작은 술병 안에 들어 있는 투명한 알코올과 싸워 이길 장사는 없었다. 끝내 간경화로 세상과 빠르게 이별하셨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5,6 학년 기간 내내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달려와 아버지의 대소변을 다 받아내고 병간호를 해야 했던 기억이 한 줌 가득하다.
그렇게 병저 누우셨던 아버지의 병상을 간호하던 초등학교 시절을 지나 중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이번에는 어머니 차례였다. 사십 된 젊은 과부로 결코 부끄러움 없이 살기 위해 하나뿐인 자식 살리려 무리했던 지난 시간들의 수고로움은 대장암이라는 잔혹한 병명으로 어머니에게 찾아왔다. 반가운 손님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꽤나 길고 오랜 시간 사투를 벌이는 수술과 항암치료의 과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던 나는, 사람의 아픔에 대해 적지 않은 이골이 나려 했다.
만나지 못했던 이별
그리고 작년 여름. 이번엔 아내 차례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발열과 발진이 순식간에 온 몸을 뒤덮었다. 밤새 아파하고 신음하는 아내를 보는 시간들은, 그 아픔이 얼마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는 어설픈 작은 위로만이 가득함뿐이었다.
때마침 우리 가정에 조심스레 찾아온 새 생명으로 인해 우리가 기뻤던 시간도 잠시, 아픔과 고통의 나날들이 지속되었다. 끝내 엄마를 아프게 하는 자신의 존재가 미안했는지, 먼저 편한 곳으로 가서 엄마와 아빠를 기다리고 있겠다 했다. 아이도 아이였지만, 아내의 회복이 우리 가정에는 더 우선이었다.
밤마다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날은 계속되었다. 대학병원에서도 원인을 밝혀 내지 못하는 염증 수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고, 반년 가까이 씨름했던 아내의 아픔도 다시 여름날이 다가오는 것처럼 차츰 멀어져 갔다.
아픔은 당신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육신의 고통만이 아픔의 전부는 분명 아니다. 각기 다양한 사유와 증상들의 아픔이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픔은 당신 혼자 누릴 수 있는 고유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당신이 아파할 때 어디선가 눈물짓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으며, 당신이 쓰러져 갈 때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진 어느 누군가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래전 티비에서 방영되었던 ‘다모’는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명대사를 만들어 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