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느려도 결국 도착하는 사람들: 느린 성장도 성장이다
느리다고 틀린 게 아니야. 그건 너의 리듬일 뿐이야
우리는 종종 빠른 성공을 좇는다. 마치 조금이라도 늦으면 실패인 것처럼.
하지만 성장에는 정해진 속도가 없다. 누군가에겐 빠른 성장이 자연스럽고, 또 누군가에겐 느린 성장이 어울린다.
느리게 성장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도 꺾이지 않는 나무는, 오랜 시간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다. 빠르게 피는 꽃이 눈에 띄지만, 천천히 피어 짙은 향을 품는 꽃도 있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세 사람이 있다.
그녀는 1937년, 영국 런던의 명문 배우 가문에서 태어났다. ‘배우의 자식’이라는 배경이 그녀를 단번에 스타로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바네사는 그 껍데기에 기대지 않았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무대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자랐고, 수많은 무대와 오디션을 거치며 무명의 시간을 견뎠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신의 색을 찾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1966년. 그녀는 두 편의 영화로 세상을 놀라게 한다. <욕망(Blow-Up)>, 그리고 <모건(Morgan: A Suitable Case for Treatment)>.이다.
<욕망>에서 그녀는 단순한 미모를 넘어선 ‘깊이 있는 연기를 하는 여배우’로 주목받았고 <모건>에서는 웃음과 슬픔을 동시에 품은 인간적인 연기로 ‘진짜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같은 해, 그녀는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다. 세상은 비로소 그녀를 ‘주목해야 할 배우’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녀의 길은 결코 빠르지 않았다. 바네사는 스크린과 무대를 오가며 깊고 진지한 연기의 세계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1977년, 영화 <줄리아(Julia)>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은 그녀의 또 다른 도약이었다.
2차 세계대전 직전, 파시즘에 맞선 두 여성의 실화를 담은 이 작품에서, 그녀는 현실과 신념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물을, 거짓 없이, 절절하게 그려냈고 이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울렸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스타로 남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진짜 연기’, ‘진짜 예술’을 향해 꾸준히 걸어갔다. 그녀는 스크린뿐 아니라 브로드웨이 무대에서도 멈추지 않고 자신을 연마했다.
그 결과 2003년, 유진 오닐의 <긴 하루의 여로> 무대에서 “시간과 상처를 통과한 배우만이 표현할 수 있는 깊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토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24년, 88세가 된 그녀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이 상은 단순히 긴 경력을 칭송하는 상이 아니었다. 세월을 견디고, 시대를 살아내며, 예술로 시대를 증언한 영혼에게 바치는 경의였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빠르게 피어난 스타가 아니었다. 한 해 한 해를 거치며 깊이 자란, 여전히 성장하는 배우였다.
오늘도 그녀는 무대와 스크린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힘차게 걸어가며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성장은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아요. 천천히 흐르는 강이 더 깊은 물길을 만들거든요.”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진짜 끝은, ‘멈추는 순간’에 오는 것이고, 누구나 자기만의 리듬으로, 자기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루스 크라우스, 그녀의 이야기엔 어떤 삶이 숨어 있었을까?
그녀는 평생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간 아동문학가이자 그림책 작가였다. 세상이 바쁘게 앞으로 나아가라 재촉할 때,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서서,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자신만의 리듬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느긋한 걸음 안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어린이 문학 속에 빛나는 꽃을 피워냈다.
1901년, 미국 볼티모어에서 태어난 루스 크라우스는 어린 시절 건강 문제로 오랜 시간을 집 안에서 보내야 했다.
창밖의 세상을 바라보며 상상하고,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림을 그리던 소녀는 세상과 한 걸음 떨어진 고요한 공간 속에서 글의 힘을 배워갔다.
세상은 언제나 그녀에게 조금 먼 곳에 있었지만, 그 거리감 덕분에 그녀는 누구보다 깊고 다정에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루스 크라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작가로서 활발히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만의 세계를 가꾸며, 말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44세가 되던 해, 첫 그림책 <당근 씨앗(The Carrot Seed)>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당근 씨앗>은 모두가 실패할 거라고 말하는 속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켜낸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단순하고 짧은 문장들 속에 담긴 끈기와 믿음의 메시지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의 마음까지 깊이 울렸다.
이 작은 책 한 권으로, 루스 크라우스는 세상에 조용하지만 단단한 첫 발자국을 남겼다.
루스 크라우스의 진짜 힘은 오히려 그 이후에 빛을 발했다. 50대, 60대, 그리고 70대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쉼 없이 더 깊고 따뜻한 책들을 써냈다.
<구멍은 파는 것(A Hole is to Dig)>, <아주 아주 특별한 집(A Very Special House)> 같은 작품들은 어린이 책을 단순한 교훈서가 아닌, 아이들의 감성과 상상력을 담은 ‘어린이를 위한 문학’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특히 루스 크라우스의 <구멍은 파는 것>은 아이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정의한 낱말 사전 같은 책이다.
‘구멍은 뛰어들기 위한 것’, ‘꽃은 심는 것’, ‘팔은 껴안는 것’, ‘얼굴은 웃는 것’처럼, 세상을 처음 만나는 아이들의 언어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빛난다.
단순하면서도 신비로운 그녀의 문장은 우리로 하여금 익숙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그녀는 정답을 가르치기보다, 아이들이 스스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힘을 믿었다.
91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루스 크라우스는 단 한순간도 상상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빠르게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도, 세상의 기준도 그녀를 흔들지 못했다.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끝까지 자신만의 리듬으로 걸어갔다.
오늘, 루스 크라우스가 우리에게 속삭이는 말은 이런 것이 아닐까?
“조금 늦게 시작해도 괜찮아. 서두를 필요 없어. 멈춰야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도 있어.”
어쩌면 진짜 중요한 일들은 빠르게 달려가는 대신, 멈추고 바라보고, 천천히 자라날 때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루스 크라우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남긴 이야기들은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잔잔히 스며들어, 오래도록 빛나고 있다.
느린 성장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내게 떠오르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에버유 필라테스’와 함께한 지 5년째인 한 회원.
처음 그녀는 체형교정도 하면서 빠르게 살을 빼고 싶어 필라테스를 찾았다. 그녀는 날마다 체중계 숫자에 일희일비하고, 식단에 집착하듯 매달렸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멈춤의 시간을 겪으면서 깨달았다.
“급하게 뺀 살은 금세 돌아온다는 걸 알았어요.”
그녀는 방향을 바꿨다.
급한 결과를 쫓기보다, 자신만의 리듬을 존중했다. 먹고 싶은 것은 적당히 먹되, 더 많이 움직이고, 꾸준히 필라테스를 이어갔다.
“느린 걸음이지만, 저는 꾸준히 걷고 있어요."
그녀의 이 말에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야구를 사랑하게 됐다.
야구장을 찾아 선수들의 땀과 열정 속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문득 깨달았다.
“나도 인생이라는 경기를 뛰고 있구나.”
초라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나는 선수들과 나이도 비슷한데… 억대 연봉도 없고, 이름도 없고…”
그때 나는 말했다.
“운동선수는 빠르게 성공하지만 그만큼 빨리 은퇴하기도 해요. 우린 그들과 리듬이 달라요. 그리고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요.”
그녀는 그 말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그 후 그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야구장을 찾을 때마다 걷고 뛰며, 그 자체를 삶의 운동으로 삼았다.
그녀는 카메라를 들고 경기를 찍기 시작했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편집해 SNS에 올렸다. 그렇게 시작된 ‘야구 사랑‘은 어느새 그녀를 ‘야구 인플루언서’로 만들었다. 야구팬들과 소통도 하고, 콘텐츠도 만들면서, PD라는 본업과도 연결되는 새로운 길을 스스로 열었다.
그녀는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사랑했고, 그 사랑은 결국 자신만의 콘텐츠가 되었다.
누군가는 그녀를 보고 “더 속도를 내면 좋겠다 “고 다그치지만 그녀는 이제 안다. 지금 현재, 자신의 리듬을 지키며, 단단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삶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삶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 성장은 겉으로 보기엔 더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을 끝내 놓지 않았기에, 누구보다 진실했고 단단했다고 나는 믿는다.
빠르지 않아도, 남들과 같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각자의 리듬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인생이라는 길을 걷고 있다.
누군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다.
누군가는 무대 위에서 생을 연기했다.
누군가는 그림책에 삶을 담았다.
또 누군가는 야구장 관객석에서 인생을 응원했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끝까지 걸었고, 루스 크라우스는 천천히 피어났으며, 에버유, 그녀는 지금도 꾸준히 뛰고 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속도보다 방향을 믿었다는 것.
세상은 빠르다.
누군가는 하루 만에 유명해지고, 누군가는 한 달 만에 살을 뺀다.
그러나 진짜 성장은 조용히, 천천히, 꾸준히 자기만의 리듬으로 이루어진다.
그 길은 더디지만, 단단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러니 당신도 지금은 비록, 느리게 가고 있더라도, 성장하는 중이다.
느린 성장도, 분명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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